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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先史)·고대(古代)  지명유래(地名由來)  삼국시대 
인구의 변천과 면적  고려시대  광복 직후의 행정구역 
조선전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과천의 분리지역 
근(近)·현대(現代)  조선후기 

인구의 변천과 면적
▣ 1. 가구(家口)와 인구(人口)

과천지방의 호구(戶口)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 이전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종 2년 (1454)에 간행된 『세종실록』 권 148, 지리 8, 과천현조에 의하면, 과천현의 호수는 244호에 인구는 743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조사는 이보다 22년 앞선 세종 14년(1432)에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남정(男丁)’만이 계상되었기 때문에 16세 미만 60세 이상의 인구는 제외되었으며, 이후 현종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머지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숙종 25년(1699) 과천현에서 최초로 발간한 읍지인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志)』에 의하면, 과천현의 호수는 세종 때 보다 무려 7.8배나 증가한 1,905호 였으며, 인구수도 남자 4,241명, 여자가 4,205명으로 모두 8,446명에 이르렀다.
이후 60년이 경과한 영조 때(1759)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과천현조에 의하면, 호수는 1.65배인 3,150호, 인구는 1.63배인 13,812명으로 각각 증가하였고, 30년 뒤인 정조 13년(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호수는 3,273호, 인구는 14,179명으로 각각 3.9%와 2.6%의 증가율을 보였으며, 광무 3년(1899)에는 호수가 3,445호로 172호, 인구는 14,217명으로 38명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신빙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주민의 신고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는데, 조세·병역·부역 등을 기피하기 위해 허위 신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행정사무의 미정비에 따른 호적의 누락이나 지방관리의 중앙정부에 대한 세공납입(稅貢納入)의 사취(私取)에 따르는 호적의 위조 등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호구조사에는 실제 호구보다 훨씬 작은 숫자가 기록되게 마련이었다.【주】76)




【도표】조선시대 과천현(군)의 호수 및 인구현황, 과천현의 면별호수 및 인구현황

과천현의 면별 호구에 대하여는 영조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책 과천현조에 의하면, 상북면(上北面)이 812호에 3,62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대체로 지금의 과천시에 해당되는 현내면(縣內面)으로 551호에 2,331명이다. 한편, 안양시의 전신인 상서(上西)·하서(下西)면은 각각 283호에 980명, 1,515명으로 7개 면 중 호수와 인구가 가장 적다. 남·녀 구성비로 보면 상서면이 여자가 680명인데 비해 남자는 그 절반도 안되는 300명에 불과하였다. 그 밖에 하서면과 동면도 여자가 남자보다 거의 배나 많았다.
정조 때에는 현내면이 620호로 가장 많고 다음이 하북면이며, 영조 때 1위였던 상북면은 574호로 3위로 순서가 낮아졌다. 남·녀 구성비를 보면 동면이 여자가 1,490명에 남자가 927명으로 1.51배, 상북면은 여자가 1,617명에 남자가 912명으로, 1.77배로 각각 여자가 남자보다 많지만 영조 때보다는 남·녀의 구성비가 많이 좁아졌다. 여기에서 특기할 사항은 상북면이 영조 때보다 호수는 298호, 인구는 1,091명이나 오히려 감소되는 기현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인 1910년 12월에 조사한 자료(「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호수는 178호였는데, 그 중 일인의 호수가 85호나 되었다.
【도표】과천현 면별의 호수 및 인구현황

인구 역시 는 1,101명이 증가했으나 일본인이 271명이나 되어 순수 한국인은 830명에 이르렀다. 이듬해 일본인들의 호수는 165호, 인구는 551명으로 2배의 증가율을 보였고, 기타 외국인도 3호나 되어 이후부터 외국인의 거주가 점차 늘기 시작했음을 알 수가 있다.




【도표】일제강점기 과천면의 호수 및 인구현황

1913년 이후 과천지방의 호구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기 때문에 차후의 호구는 당시 과천면이 시흥군에 속했던 관계로 시흥군 호구에 대한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흥군은 1917년 이후 급격한 호구의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1899년 경인선,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영등포역이 생기면서 영등포가 서울 남쪽의 중심지로 급한 팽창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흥군의 군청도 1910년에 군내면 시흥리에서 북면 영등포리로 이전하였던 것이다.
1931년에는 영등포면이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5년까지는 영등포읍의 인구만도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듬해인 1936년에는 경성부의 확장책에 따라 영등포 일대가 경성부에 편입되게되자 이후부터는 시흥군의 인구가 감소되기 시작했다.



【도표】시흥군(始興郡)의 인구추이(人口推移)(1910∼1935)
【주】77)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듬해 과천면의 가구수는 932호였으며, 인구 또한 5,340명에 불과하였다. 이후 11년이 경과된 1960년도의 가구는 997호로 1949년보다 불과 65호가 증가하였고, 인구는 6,147명으로 807명이 증가하였다. 이것은 당시 과천면이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낮은 인구 및 가구 증가율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1970년에는 그 전년의 1,361호에서 1,800호로 급격히 증가하였고, 2,000호를 넘어선 1972년(2,062호)부터 점차 증가율이 높아졌다.
1977년에는 3,279호로 1949년 대비 3.51배로 증가하였으며, 이어 1978년에 정부제2종합청사가 과천에 설립되기로 결정나자 이듬해에는 가구수 3,646호에 인구수는 17,084명으로 증가하였다.




【도표】과천면의 면적·가구·인구현황

1982년 6월 10일에 경기도과천지구출장소가 개소되자 호수가 9,967호로 전년보다 무려 3배가 증가하였으며, 1984년에 16,963호로 급팽창하였다. 인구 또한 1982년에 41,208명으로 전년보다 26,048명이나 늘었고, 이듬해에는 60,948명으로 전년 대비 1.47배의 증가를 보였다.
1986년 시로 승격된 후에도 가구와 인구는 계속 증가추세를 보였는데, 가구는 1986년 17,953가구에서 1992년에는 24,349호 (1.35배), 인구는 66,901명에서 72,570명으로 1.08배가 늘었다. 그러나 가구당 가족수는 1986년에 3.7인에서 1992년에는 2.98명으로 줄어들어 점차 핵가족화가 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991년 12월 말 현재까지 과천의 가구수와 인구 추이를 주요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과천지구출장소 면적·가구·인구현황, 과천시 면적·가구·인구현황



▣ 2. 면적(面積)

근대 이전의 과천의 행정구역에 속하였던 지역의 면적을 조사한 기록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봉건국가에서 조세징수를 위해 실시한 경작면적 조사결과가 단편적으로 나타나므로 근대 이전에는 경작면적의 변동추이를 살피는 것으로 과천의 면적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 과천현의 경지면적은 『세종실록』 권 148, 지리 8, 과천현조에 의하면, 3,128결인데, 그 중에 논이 1/3이 넘었다. 당시 경기도 전역의 경지면적은 모두 182,224결인데, 그 중 수원이 19,154결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도 군현의 평균결수는 4,338결이었다. 그러나 이후 임진왜란(1592)과 정묘호란(1627) 및 병자호란(1636) 등으로 농토는 피폐해지고 많은 토지대장이 소실되어 전국의 농토가 격감되었다.【주】78)
과천현의 경우, 18세기 중엽의 결수는 1,560결로【주】79) 조선 전기보다 무려 50%가 감소되었다. 이러한 피해는 호당 경지면적에도 영향을 주어 조선 초기에는 12.8결에 해당되던 것이 18세기 중엽에는 0.5결에 불과했다. 이후 타 지방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과천지방은 1899년에도 1,565결 6부1【주】80)속으로 18세기의 그것과 큰 변동이 없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조선총독부가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는 통감부시대 초기부터 계획해 오던 것으로 1910년 3월에 개설된 한국토지조사국이 강점과 함께 조선총독부내의 임시토지조사국으로 명칭을 바꾸어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7년여의 기간에 완료하였다.
이 사업의 결과 경기도의 경지면적은 조사전의 227,550정(町)으로부터 335,802정까지로 약 70%의 증가를 보았지만, 막대한 토지가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토지를 잃은 농민이 많이 나타났다. 시흥군은 10개 읍면에 면적이 24.516방리로 38,127.3정보에 이르렀는데, 그 중 과천면이 2.299방리로 3,575.4정보였다. 시흥군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읍면은 수암면으로 3.818방리로 5,937.7정보였고, 다음이 동면·군자면·서면의 순이었으며, 영등포읍이 0.440방리에 684.3정보로 가장 작았다.【주】81) 일제강점기 시흥군의 읍면별 면적현황은 다음과 같다.
【도표】시흥군(始興郡)의 면별면적(面別面績)

시흥군의 면적은 1936년 4월 1일 영등포·노량진 일대가 경성부에 편입되자 현격히 감소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1949년 구로리·도림리·번대방리가 서울시에 편입되어 더욱 격감되었는데, 1949년 9월 현재의 시흥군의 면적은 총370.53㎢로 9개 읍면 중 동면이 68.53㎢로 가장 넓고, 다음이 수암면으로 61.01㎢, 군자면이 55.95㎢였으며, 과천면은 36.80㎢로 전체 면적의 9.9%를 차지하였다.
이후 과천면의 면적은 변동이 없다가 1975년에는 1.41㎢가 줄었으며, 1977년부터 약간씩 느는 추세를 보여 35.77㎢, 1982년에 35.78㎢, 1984년에 35.79㎢, 1986년에 35.80㎢에서 1988년부터 35.81㎢였다. 이를 법정동별로 보면 문원동이 12.79㎢(35.7%)로 가장 넓고, 이어 과천동 10.77㎢(30.1%), 중앙동 7.09㎢(19.8%), 갈현동 4.11㎢(11.5%), 별양동 0.68㎢(1.9%), 부림동 0.37(1.0%)의 순이다.

【집필자】 李承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