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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 제3장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과천(果川)

○ 제1절 임진왜란과 과천
○ 제2절 과천의 토산물
○ 제3절 역참제도
○ 제4절 정조의 거둥길
○ 제5절 토지제도

▣ 제1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과천(果川)

○ 1. 임진왜란전의 대일관계
○ 2. 임진왜란의 발발
○ 3. 의병의 활동
○ 4. 과천 근처 광교산 전투에서의 근왕군 패배
○ 5. 독성산성 전투와 과천
○ 6. 세자 광해군의 남행과 과천
○ 7. 임진왜란의 결과와 과천의 피해
▣ 1. 임진왜란전(壬辰倭亂前)의 대일관계(對日關係)

조선왕조는 일본에 대해 전통적인 외교정책으로 교린(交隣)정책을 폈는데, 이것은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우리의 해안을 자주 침범한 왜구(倭寇)를 막기 위한 회유적인 평화정책이라고 하겠다. 즉, 조선왕조로서는 대명(對明)외교에 집착하였고 일본은 우리보다 하위의 나라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정식적인 외교활동은 벌이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변방을 자주 침입하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일본의 침략이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일(對日)외교도 정식이 아닌 대마도에 거주하는 도주(島主) 종(宗)씨를 중계로 하여 전개되었다.
조선왕조는 대일 교섭으로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 이후 삼포(三浦)에 한하여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포에서 왜인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여 대마도에 내려주는 세사미(歲賜米)와 무역을 하는 세견선(歲遣船)의 수를 반으로 줄였다. 이어 1544년에는 왜구가 약속을 어기고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자 정미조약(丁未條約)을 맺어 왜인에게 더욱 엄격한 제재를 가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강력한 대응에 왜구들은 1555년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70척의 선박을 이끌고 침입하여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을 일으켰고, 마침내 조정은 일본과의 일체의 교역을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족리막부(足利幕府)가 망하고 전국시대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나 곧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그의 뒤를 이어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의 통일을 이루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로 구주(九州)지방을 정벌한 후 오랜 기간 싸움을 통해 전력을 증강해 온 제후들을 이용하여 대륙 침략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당시 대마도주인 종의조(宗義調)와 종의지(宗義智) 부자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우선 조선정부가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도록 교섭할 것을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선조 20년(1587) 대마도주는 그의 가신인 귤강광(橘康廣)을 일본왕의 국사로 삼아 부산포에 보내 통호(通好)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의 통신사 파견이었다. 이러한 사신의 요청을 접하고 선조는 반대하였으나, 2품 이상의 정신들에게 그 가부를 묻자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사신들이 한양에 올라와서 수교문을 바쳤는데, 그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 즉, 외교문서라 할 수 있는 서계(書契)의 내용이 종전과는 달리 매우 오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에 회답을 하지 않고 보류하고 있었는 바 조헌(趙憲)이 통신사를 절대 파견하지 말도록 상서를 올리는 등 반대의견이 많이 대두되었다. 통신사 파견 문제는 이듬해에 다시 논의되었으나 조선정부는 수로(水路)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통신사의 파견을 보류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에 풍신수길은 분개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보였고 계속해서 대마도주에게 조선의 일본 입조(入朝)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독촉에 대마도주인 종의지는 하는 수 없이 1588년에 다시 성주사(聖住寺)의 주지 현소(玄蘇)와 가신(家臣)인 유천조신(柳川調信) 등을 일본 국왕의 사신이라 칭하고 부산포에 파견하였다. 이에 조정은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고 접대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의 입조는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통신사의 파견만을 거듭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들은 일단 돌아 갔다가 이듬해에 현소를 정사로 하여 다시 왔다.
이에 조정은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연안을 침범하는 자를 잡아 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고 명분을 찾았다. 이에 현소가 즉각 응하고 자국에 있던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서 포로로 바치니 조선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통신사의 파견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리하여 다시 조정은 파견을 논의하여 일본의 속셈도 알아 볼 겸 보빙(報聘)을 겸하여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1589년 11월 중순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을 중심으로 하는 통신사 일행이 선정되었고, 그들은 이듬해 현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어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그 곳에서 한 달 간 머무르다가 경도(京都)에 이르렀으나 당시는 풍신수길이 동북지방을 경략(經略) 중이었으므로 11월에야 비로소 그를 만나 국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답서가 곧 있지 않자 일행은 곧 바로 경도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물렀다. 이어 보름만에 답서가 왔는데, 이를 본 사신들은 그 내용이 오만불손하다 하여 고쳐 올 것을 요구하였고, 여러 곳의 자구를 고쳐 받은 후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통신사가 돌아 오는 길에는 함께 갔던 현소와 유천조신 등의 일행이 동행하였다.
통신사의 사행이 끝난 후 사신들은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때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침입할 정세는 보지 못하였고 풍신수길의 눈이 마치 쥐의 눈과 같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동행하였던 허성과 황진(黃進)은 정사인 황윤길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정은 황윤길과 허성이 서인(西人)이었던 관계로 당시 득세하고 있던 동인(東人)인 김성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일본의 침략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고 병사를 훈련시키던 일도 중지시키는 등 방비에 한층 소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쟁이 심화되어 국외의 사정에 눈을 돌릴 수 없었다.【주】1)

▣ 2.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발발(勃發)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한 전쟁으로 1차의 침입은 임진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임진왜란’, 그리고 2차의 침입은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통상 이 두 차례의 침입을 묶어‘임진왜란’이라고 칭하고 있다.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곧 바로 자신의 군대를 9번대로 나누어 원정군을 편성하였다.【주】2) 제1번대는 소성행장(小西行長)으로 병력은 18,700명, 제2번대는 가등청정(加藤淸正)으로 22,800명, 제3번대는 흑전장정(黑田長政)으로 11,000명, 제4번대는 모리길성(毛利吉成)과 도진의홍(島津義弘)으로 14,000명, 제5번대는 복도정칙(福島正則)으로 25,000명, 제6번대는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으로 15,000명, 제7번대는 모리원지(毛利元之)로 3만명, 제8번대는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로 1만명, 끝으로 제9번대는 우시수승(羽柴秀勝)으로 11,500명 등 총 158,700명이었다. 이 외에도 수군으로 구귀가릉(九鬼嘉陵)과 등당고호(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9,000명이 있었고, 정규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거의 20만명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0만명 정도가 전쟁의 추이를 살피면서 일본에 대기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선봉장 소서행장이 이끄는 선발대가 700여 척의 전선에 나누어 타고 다음날 새벽부터 부산에 상륙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왜군의 침입이 조정에 처음 알려진 것은 4월 17일 새벽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급한 보고에 의해서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급히 이일(李鎰)을 순변사,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 조경(趙儆)을 우방어사. 그리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에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이어 4월 20일에는 신립(申砬)을 삼도도순변사로 삼고, 김응남(金應南)을 부사에 임명하였다. 이어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전쟁을 총지휘하는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왜군의 북상을 조령·추풍령·죽령 등에서 막게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조총과 조직화된 병력으로 계속 북진, 이일은 상주에서, 신립은 충주에서 각각 참패하였으며, 이로 인해 도성인 한양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충주 지방의 전투에 대하여는 일본측의 자료인 다음의 기록에서 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충주부근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군은 최후의 운명을 걸고 한양에서 8만의 군사가 그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기병이었고 일본인과 일전을 하기 위해 왕궁의 신분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병력에 있어 우세하고 소서행장의 군은 오는 도중에 피로가 쌓였으므로 승리는 우리(조선)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 일본인들도 피아의 병력 차이가 컸고 불균형한 것을 보고 당황해 하였다. 조선군은 전진(戰陣)을 정비하고 초승달 형으로 진을 치고 일본 군진의 중앙을 습격하고 한 병사도 도망하지 못하게 포위하였다. 그러나 양군이 접근하였을 때 조선군의 예상은 틀려졌다. 일본군의 기치가 휘날리고 다수의 병사가 모습을 나타내면서 조선군을 향해 포화를 쏘았다. 이에 조선군은 견딜 수 없어 조금 후퇴하였으나 곧 다시 대세를 가다듬고 1,2차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주 계획적으로 진출하여 조총과 태도(太刀)의 위력을 발휘하여 습격하였으므로 조선군은 전장을 포기하였다.【주】3)
위의 기록이 완전히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8만의 군사라는 것은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고 일본군이 숫적으로 열세였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군은 매복하여 그 수를 속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일본의 신식무기인 조총의 위력은 전쟁 중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듯하다. 어떻든 전투의 결과 조선군은 참패하였고 장군인 신립은 단기로 적진에 들어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달천에 투신 자살하였으며, 충주 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종사관 김여물(金汝푁)·박안민(朴安民)등도 함께 전사하였다.
소서행장의 선봉대에 이어 이후 4월 18일 가등청정의 군이 부산에, 제3번대는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는 등 왜군은 계속해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후 제1번대는 중로, 제2번대는 좌로, 제3번대는 우로로 북진하였으며 수군 등의 지대(支隊)는 연안을 끼고 서진(西進)하였다. 이들의 한양까지의 진로는 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한양이었고,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령-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이었다. 한편,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부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였다.【주】4)
그들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동원하여 쉽게 북진하여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으니 이 때가 5월 3일이었다. 풍신수길은 5월 16일 가등청정으로부터 한양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즉시 표창하고 이어서 여러 장수들에게 여관(旅館)의 건축을 명령하였다. 자신의 일본 명호옥(明護屋) 본영을 조선으로 옮겨 사용할 장소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건축 담당은 한양의 경우는 우희다수가이고, 양지·용인·과천의 경우는 사국(四國)지방의 군사를 시켰다.【주】5) 이로써 볼 때 풍신수길은 한양으로의 입성시 과천 지역을 통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한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과천에서 하루를 머물고 한양으로 입성하려는 의도였던 듯 하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아 잠시 대오를 정비하였다가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마지막 보루였던 임진강에서의 전투에서 김명원(金命元)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의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서행하게 된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 지역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후방을 교란하게 되고 조선 수군의 연이은 승첩으로 후방의 보급로가 끊어짐을 두려워한 왜군은 무작정의 북진을 자제하였다. 한편, 한양을 점령한 왜군 부대는 북침에 나선 군사를 제외하고 각 점령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머물러 있었다.
선조 25년 5월 이후 과천지방 근처에 있었던 적의 주둔군은 용인 부근에 1,500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협판안치(脇坂安治)와 죽산부에 주둔하고 있던 5번대의 주장 복도정칙(福島正則)의 4,800명이었다.
한편, 선조 25년 7월 이후 왜군의 병력배치를 경기도 한강 이남에 한해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地域   兵力   主將      地域   兵力    主將
京城   10,000  宇喜多秀家   京城   2,000   前野長康
京城   3,000   增田長盛    京城   3,500   長岡忠興
京城   2,000   石田三成    果川    ?    花房職之
京城   1,200   大谷吉繼   地點未詳   ?    長船紀伊守
京城   5,000   長谷川秀一   龍仁    ?    宇喜多左京進
京城   3,500   木村重玆    陽智   3,000   中川秀政
京城   1,000   加藤光泰    竹山   4,800   福島正則

위의 주장 가운데 과천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은 우희다수가의 부장인 화방직지(花房織之)였고, 정확한 군사의 수는 파악할 수 없다.

▣ 3. 의병(義兵)의 활동(活動)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관군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왜군에 궤멸되어 갔다. 그 원인은 적군의 정예화와 신식무기의 소지에도 있었지만, 또한 당시 지방 수령들이 민심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왜군이 쳐들어 오자 백성들은 관군이나 수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즉, 민·관·군의 불일치가 처음의 패배를 자초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 호응을 보이지 않았던 백성들은 이후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적과 대항해 싸우기 시작하였다. 관군과 달리 의병들은【주】6) 혈연적 내지 지연적으로 굳게 뭉쳐 있었으므로 적군을 만나도 향토의식이 강하여 쉽게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의병의 발생 원인과 역할에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임진왜변에 국왕이 서쪽으로 옮겨가고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적병이 가득하여 호령(號令)이 시행되지 않아서 거의 나라를 잃은 형체를 잃은 것이 달포를 넘겼다. 그러나 영남의 곽재우(郭再祐), 호남의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 호서의 조헌(趙憲)등이 의병을 일으켜 가깝고 먼 곳에 격문을 전달하자 이로부터 백성들이 비로소 나라를 지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주와 군의 사자(士者)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어 의병장을 호칭한 자가 무려 수 백 사람으로 왜적을 죽여 없애 국가가 회복된 것은 모두 의병의 힘에 의해서였다.【주】7)
의병장은 대개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많았고, 무신은 적었으며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받는 유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의병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의병장들은 의병을 일으키는 장소로 자신의 고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그곳의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곳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의 주요 활동 무대는 하삼도(下三道)였는데, 이는 왜군이 조선 침공을 위해 3대로 나누어 중·좌·우도의 간선도로를 따라 급진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하삼도 지역의 요지에만 후방진지를 구축하였으므로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왜군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고, 이로 말미암아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의병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전세는 조금 회복되었는데 적군이 후방의 원조가 끊김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왜적으로서는 후방과는 상관없이 관군을 물리치고 한양이 점령되면 곧 조선이 항복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의병이란 존재를 알지 못하고 단지 관군만을 자신들의 싸움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주】8) 곧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모르고 일본 내에서의 생각만을 한 듯하다. 이를테면 풍신수길로서는 전국시대에 있어서 전쟁 경험만을 믿고 작전을 계획한 결과 이러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의병이 하삼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왜군이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하였으므로 이 곳과 가까운 과천에서 의병이 일어나기는 어려웠다. 즉, 과천지방에는 이미 적의 주둔병이 진지를 구축,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만 다른 지방보다 심했을 뿐 의병이 활약하기에는 어려웠다. 단지, 경기도 지방에서 홍계남(洪季男) 부자와 박춘무(朴春茂) 등의 활약이 있었고, 8월 우성전(禹性傳)이 수 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화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의 의병과 합류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활약을 살펴보면, 홍계남의 경우 아버지인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양성과 안성을 활동무대로 적군을 물리쳤는데, 적의 상황을 살펴 유격전을 전개하여 1592년 7월말 경 안성에서 왜군 복도정칙(福島正則)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였다. 박춘무는 강화와 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쌓았다.
어떻든 이러한 경기도의 의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천지방은 하삼도의 의병이 경기지방으로 한양을 재탈환하기 위해 진격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임진년 12월 권율(權慄)에 의해서 수행된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 싸움이었다.

▣ 4. 과천(果川) 근처 광교산(光敎山) 전투(戰鬪)에서의 근왕군(勤王軍) 패배(敗北)

임진왜란 초기(1592년 4월)에 왜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해서 들어오자 선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조정의 대신들도 과연 선조가 피난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양분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9일 충주에서 신립의 패전소식이 전하여지자 그 전까지 한양의 사수를 고수하던 신하들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어 유성룡의 말에 따랐다. 유성룡은 왕자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호소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 갈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선조는 피난을 결정하게 되고, 이에 앞서 4월 28일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도순찰사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도순찰사로 삼아 그 곳의 지역에 사는 주민을 무유(撫諭)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5월 3일 도성이 점령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용 병력을 임진강 전선에 투입하는 한편, 시강원 심대(沈垈)를 충청·전라·경상도에 파견하여 근왕군을 모집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이광(李洸)에게 근왕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광은 4월 8일 관할 지역에서 군사 8,000명을 조직하여 5월 4일 공주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한양이 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선조 또한 서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한 적이 있었다.
심대가 전해 조정의 명을 접한 이광은 다시 전주·나주·광주 지역의 군사를 다시 모아 북상을 시도하였는데,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징발된 군사 4만으로 2개군을 편성하였다. 이광군의 편성은 병력 2만으로 대장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 이광, 전부사(前府使) 이지시(李之詩),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이었고, 전라도 방어사 곽영 역시 군사 2만으로 선봉장에 부사를 역임한 백광언(白光彦)과 중위장에 광주(光州) 목사 권율(權慄)이었다. 이들은 북진하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근위병과 합류, 군세가 5만에 이르렀다. 6월 3일 수원에 도착하자, 당시 이 곳에 있던 소수의 왜군은 싸우지도 않고 그 위세에 눌려 용인지방으로 퇴각하였다. 그들은 다음날 왜군이 용인 부근에서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이들을 먼저 격멸한 후에 한강으로 북상하기로 하였다.【주】9)
근왕군의 주력인 이광의 군대는 용인 부근에 도착하자 북두문산(北斗門山)에 소규모의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곽영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한편 왜군은 조선군의 대병력이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어 자신들의 주장인 협판안치(脇坂安治)에게 증원군을 요청하고, 아울러 문소산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조총을 사용하여 조선군의 전진을 막으면서 지구전으로 들어 갔다.
5일 문소산에서 왜군의 목책(木柵)을 포위하고 있었던 근왕군은 그들의 완강한 수비에 고전하다가 지쳐서 급기야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협판안치의 본대가 도착하여 측방을 공격하니 이에 합세하여 포위되어 있던 왜군도 일제히 나와 출격하였다. 왜군의 수는 4, 5천에 불과하였고 조선군의 진과 서로 2, 3리 거리에 있었는데, 적의 총소리가 한 번 나자 조선의 대군은 쉽게 무너졌다. 이광 등이 흰옷을 갈아 입고 서로 잇따라 달아나니 5만의 군사가 순식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한 것이었다.【주】10)
이 싸움에서 단지 권율이 지휘하는 중군만이 대열을 유지하고 퇴각하였을 뿐 전라·충청의 나머지 군사들은 광교산(光敎山)으로 분산되었다. 그러나 광교산으로 들어갔던 군사들도 다음날 왜병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게 되자 모두 자신들의 고향으로 도망갔다. 이렇듯 하삼도의 5만의 군사가 불과 4, 5천도 못되는 왜군에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은 더 이상 한강 이남 지역에서 조선 관군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주】11)
왜군이 침략하였을 때 조정의 전략은 지상의 군대를 이용하여 적의 북진을 막고 수군을 이용하여 해로를 차단함으로써 북진 중에 있는 왜군을 양분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왕병들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패하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단지, 수군이 남해안에서 연전 연승하여 더 이상의 조선정벌군을 오지 못하게 함과 아울러 군량의 조달도 어렵게 하여 왜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는 의병의 활약과 함께 왜군 철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5. 독성산성 전투와 과천

임진왜란 당시 과천지방에서 직접 벌어진 전투는 없었으나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왜군이 과천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므로 여기에 기술하고자 한다. 과천 바로 남쪽에 위치한 광교산(光敎山)에서의 패전은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나, 독성산성에서의 전투는 우리 군대의 사기를 앙양시킴과 아울러 전쟁을 우리쪽으로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왜군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의 군사를 상대로 별 어려움이 없이 전진하여 한양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592년 12월 경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은 거의 6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후방의 전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군량이 끊기는 등 후방에서의 지원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나아가서 약탈행위를 함으로써 많은 백성이 고통을 당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은 수하의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이제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소굴로 되었는데, 한성부는 그 심장부가 되는 땅이므로 먼저 이 곳을 탈환한다면 서쪽의 길이 스스로 열릴 것이오”라고 하여, 정병 1만을 거느린 다음 북상하여 왕을 도우려 하였다. 당시 체찰사 정철(鄭澈)도 배를 타고 아산(牙山)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권율을 찾아와 돕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왕이 평순하고 곧 명나라의 군대가 올 것인데, 군사는 많으나 군량이 적으며, 자용(資用)이 부족하므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하여 군대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권율은 군사를 직산 부근에 주둔시키고 임금의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조는 권율로 하여금 나가서 한성의 적을 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앞서 용인과 광교산에서 5만의 병사가 크게 패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한성까지 직접 올라가지 않고 수원에 있는 독성산성에서 진을 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는【주】12) 이러한 조선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후방의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였다. 곧 그는 권율의 군사가 매우 정예한 데다가 한양에서 가까운 수원 부근에 웅거함으로써 한양에서 지방으로 연락함에 많은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서(關西)와 관북(關北) 방면으로 나아가는 데 많은 지장을 받으리라고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 만의 군사를 풀어서 3진을 쌓고, 이어 과천과 오산 등에 진을 펴 놓은 다음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의 군사를 유인하여 성 밖에서 격파하려 하였다.



【사진】독성산성

그러나 이러한 작전을 눈치챈 권율은 경솔하게 이에 응하지 않고 단지 성만을 굳게 닫고 고수하고만 있다가 적이 약한 틈을 보이면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습격하였다.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한 가지씩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예컨대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는 자 수 백명은 북문을 열고 불시에 나아가 돌진하면서 흑각대궁(黑角大弓)으로 적진에 화살을 퍼붓고 돌아왔으며, 힘이 좋은 사람 수 십명은 도끼와 창 등을 들고 나아가 요로에 잠복하고 있다가 적병이 나타나면 일시에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한편, 야간에는 거화(炬火) 등으로 적진을 에워싸고 소란작전을 폄으로써 왜군의 수면과 휴식을 방해하고 보초병과 급수병 등을 기습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 적으로 하여금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하였다.
이처럼 독성산성에서 조선군이 선전하는 동안 전라도 도사(都事)인 최철견(崔鐵堅)은 권율의 군사를 지원하기 위해 의병장 변사정(邊士貞)과 임희진(任希進) 등으로 하여금 의병을 데리고 올라가 돕게 하였다. 이들은 올라오는 도중 깃발을 많이 들고 금고(金鼓)를 높이 울리면서 산지에서 산지로 행동하며 주야로 성중에 들어 갔다. 이러한 모습을 본 왜군은 대병력의 증원군이 입성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성의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였다.
왜군은 멀리서 진을 치고 성 안으로 흐르는 급수원을 차단하는 성의 고립화 작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야간에 검은 옷으로 위장한 군사를 보내 적의 감시병을 죽이고 막은 제방을 허무는 한편, 역으로 적진으로 흘러가는 냇물에 아침 저녁으로 오물을 버리어 급수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괴롭힘으로써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초조와 불안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반격에 왜군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단지 농락만 당하고 있음을 분하게 여겼다. 그러나 별다른 묘책이 없는 데다가 추위에 시달리고 노숙도 힘들어 마침내 영책(營柵)을 불사른 후 한양으로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권율은 정예한 병사 1천인을 풀어 적의 퇴로를 엄습하였으니, 적은 또 다시 참패하고 과천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면서 한양으로 입성하고 말았다.



【사진】독성산성 군영지

독성산성의 전투와 관련하여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독성산성에는 세남천(細南川)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개천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 갔는데 왜적이 밤중에 개천을 막았다. 이에 권율은 물이 부족하여 먹는 물도 곤란해지자 며칠 동안 쓸 물을 저장해 놓고 서장대(西將臺)에 높이 장막을 치고 약사들을 불러 노래를 하면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어 군마를 삼삼오오 떼지어 놓고 물로 씻고 솔질을 하였다. 이에 왜적이 막은 개천을 다시 터놓으면서 “성중에 말씻을 물이 저렇게 많으니 어찌 먹을 물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하여 성안에 물이 부족하다 말한 간첩을 죽었다. 그러나 사실 말을 씻은 것은 물이 아니라 하얀 쌀이었기에 서장대를 세마다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주】13)



【사진】세마대

이 전투의 결과로 경기도 일원에 산재하고 있던 적병들은 마침내 약탈을 단념하고 단지 부산에 이르는 후방 노선의 확보에만 전념하였다. 이로써 조선군은 육상에서 의주에 이르는 연락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시 독성산성에서 왜군과 전투한 조선의 장수는 전라도순찰사 권율, 전라도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 전라도 병사 선거이(宣居怡), 전라도 소모사(召募使) 변이중, 의병장 변사정과 임희진 및 의병승(義兵僧) 처영(處英) 등이었다.
전투에 패한 왜군은 진지를 분산·배치하고 군사를 대폭 정리하여 연락거점을 중심으로 진지를 강화하였다. 당시 왜군이 진지를 거점별로 구축한 상황을 경기도에 한하여 살피면, 한성부와 과천현, 용인현의 경우는 우희다수가가, 죽산부(竹山府)는 복도정칙(福島正則), 양지현(陽智縣)은 중천수성(中川秀成)이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렇듯 왜군이 거점을 중심으로 진지를 구축하자, 거점 이외의 지역에는 피란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생기고,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을 반드시 쳐부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의 원조군이 머지 않아 오게 될 것으로 믿어 백성이나 의병, 군대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천의 경우는 적의 진지가 그 때까지 구축되어 있었으므로 과천에 사는 백성들은 돌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적이 상주하고 있어 피해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왜군 진지 상황도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권율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한성부와 더욱 가까운 곳을 전투지로 모색하게 되었는데, 서쪽 지역을 정찰한 결과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진지를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전라병사 선거이로 하여금 군사 300명으로 모든 군사가 옮기는 식으로 가장하여 적을 속이고, 변이중으로 하여금은 시흥 지역에서 광교산 부근까지 지키면서 행주 방면으로의 이전을 엄호하게 하였다. 한편, 정철은 직산에서 북상하여 양주로 와서 작전지시를 받았다. 이 행주산성에서 그 유명한 대첩이 두 달 후에 이루어진다.

▣ 6.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의 남행(南行)과 과천(果川)

1592년 선조가 한양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고 서행(西行)할 준비를 하자 신하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우기를 간청하고 이에 선조도 동의하여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왕의 일행은 처음 100여 명에 달하였으며 개성까지는 3일이 소요되었는데, 서행하는 동안 수행원의 수가 많이 줄어 들어 이곳까지 따라 온 관원을 대상으로 관직을 다시 제수하였으므로 관직의 변동이 심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국왕인 선조와 집권층은 서행의 혼란 속에서도 사대적이고 외세의존적인 ‘도요론자(渡遼論者)’와 이를 반대하는 자주적이고 자구적(自救的)인 ‘고수론자’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도요론이란 왜군이 한양·평양등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쳐들어 오자 요동으로 건너가 명에 의존하자는 것이고, 반대로 고수론자는 끝까지 왜군에 항거하자는 것이었다. 이 양파는 전쟁 중 대립과 절충을 계속한 끝에 당시 절대적이라 새간주된 왕권을 나누어 세자 광해군이 이끄는 별개의 조정을 만드는 분조(分朝)를 단행하였다. ‘분조’란 비상난국을 대처하기 위한 국와의 조정 이외에 임시로 설치된 세자의 조정을 의미한다.【주】14)
임진왜란시 분조는 2차에 걸쳐 있었는데 1차의 경우 선조25년 6월 14일 영변에서 결행되었다. 이에 따라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감국(監國)과 무군(撫軍)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 분조는 처음 강계로 행하였다가 남으로 기수를 돌려 희천을 거쳐, 강원도 이천까지 내려왔다. 이후 성천, 강서, 용강, 영변에 이르렀다. 이 동안 세자는 나라의 건재와 항전의식을 전국토에 널리 알리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다.
더욱이 김천일과 이정암(李廷촑)등 의병의 봉기와 활동을 고무시켰을뿐 아니라 한양과 평양의 주요 거점인 연안성 수복에 기여하였음을 물론, 강화 중심의 해로를 확보하는데 힘써 의주에 있던 선조의 행조(行朝)와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고리를 제공하였다.【주】15) 이러한 1차 분조는 다음해 1월 전쟁이 우리쪽으로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선조와 정주에서 합주(合駐)하여 사실상 해체된다.
한편, 2차 분조는 선조 26년 윤11월 광해군이 하삼도로 남행하여 12월 국왕으로부터 법적 승인을 받고 다음해 7월 군신들에 의해 분조의 해체가 합의되고 8월 세자가 한양으로 돌아옴으로써 완전히 종결된다. 2차분조시 세자는 남행을 하게 되는데 목적지는 전주로 삼은 듯하다. 그러나 실지로는 전주보다는 공주나 홍주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조 26년 윤11월 19일 한양을 출발하여 다음해 8월 25일까지의 과정 중 처음 과천지방에서 세자인 광해군이 하루를 머물렀으므로 여기에 소개한다.

年 度   月 日    內 容    年 度   月 日    內 容
1592   閏11. 19  漢陽 出發    1593    2. 11   公州에서 全州로
1592    11. 19  果川縣 一泊   1593      21   全州에서 洪州로
1592      20  水原府      1593     22   淸陽一泊
1592      24  稷山縣      1593     23   洪州 到着
1592      25  溫陽縣      1593    8. 7   公州 入城
1592      29  振威縣      1593     20   公州 出發
1592    12. 1   公州滯陣     1593     23   水原府 一泊
1592      16  公州駐留     1593     24   廣州民家 一泊
1593     1. 1  公州駐留     1593     25   漢陽 歸還


▣ 7.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결과(結果)와 과천(果川)의 피해(被害)

7년 간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 일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피해가 극심하였다.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명이 도탄에 빠졌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현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정도이다. 가령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국토는 전체 농지가 170만결이었는데 반해 전쟁 후에는 이것이 54만결로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보았고,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정도로까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왜군은 야만적이고도 철처하게 우리 백성을 약탈하여 가는 곳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문화재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 게다가 백성을 포로로 일본으로 데려가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심지어 노예로 매매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활자공과 도공은 이후 일본의 도자기 문화와 활자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유학자로부터는 성리학을 배워 이를 발전시겼다.
정치적으로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하여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자초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국내의 봉건제후가 급속히 약화되어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통일을 이루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명나라도 대군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국력이 쇠퇴, 청으로의 왕조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동양 삼국의 변화에 실로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임진왜란은 결코 우리가 패배한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군의 패배라는 점이다. 그들이 평화적으로 있었던 조선에대하여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전챙 초인 2개월만 승리를 거두었지 80개월에 걸친 전 기간 동안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곧 그들은 일본의 구주지방과는 기후조건이 아주 다른 조선에서의 추위와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들은 조선의 추위에 시달렸고, 식량의 결핍과 무기의 고갈로 말미암아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 죽어갔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점령한 곳은 국토가 아닌 주요거점과 통로만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이로 인해 평양 점령 이후에는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군이 반년 이상 평양으로부터 적의 북진을 막았고, 다음에 1월 초에는 명나라 군사의 힘을 얻어 일시에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이어 20일만에 적을 한양 근교까지 물리쳤던 데에서 알 수 있다.
조·명군의 평양성 공략에 앞서 소서행장의 막하 장수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점을 더욱 뒷받침 해준다.
병사들은 지치고 많은 수가 전사 또는 부상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은 떨어지고 장비는 손상되었다. 게다가 성 밖에 있던 식량창고마저 소실되었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가 예상과 같이 내일 쳐들어 온다면 우리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주】16)
한편, 조선침공에 동원된 병사는 15만이었는데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퇴각한 숫자는 그1/3인 5만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전사·병사·기아·질병 등으로 죽었다 한다. 더욱이 부산으로 철수한 왜병들의 진영은 군사들의 인색이 고쇠(枯衰)하고 척골(瘠骨)로 먹을 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자신만을 생각해 조총이 녹슬어도 돌보는 자가 없었더라고 할 정도로 생지옥 같았다.
이러한 적의 사정으로 4월 하순에는 수도를 완전히 수복하고 적을 남쪽으로 몰아 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순신의 연이은 승첩과 민초와 같이 꿋꿋한 의병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끝으로 임진왜란 당시 과천지방의 피해상을 살펴보면 과천에 사는 김성(金惺)의 처 라씨(羅氏)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라씨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이 무기로써 협박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자 왜군이 화를 내어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선조실록(宣祖實錄)』 권 137, 선조 34년 5월 계축조).【주】17) 이처럼 백성에 대한 인적피해가 있었던 것은 비단 라씨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왜적에게 항거한 자는 극히 많았을 것이고 과천의 경우 왜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극심했을 것이다. 또한 문화재도 다른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었는 바 향교가 불에 타 선조 34년(1601)에 다시 세웠으며, 관청 건물도 불에 타 없어져 이후 재건되었던 것이다.

【집필자】 張得振


▣ 제2절 과천(果川)의 토산물(土産物)

○ 1. 특산물과 자연환경
○ 2. 특산물의 내용


▣ 1. 특산물과 자연환경

물산이라는 것은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관련하여 결정된다. 왜냐하면 어느 한 지역의 토양은 원래 기풍과 지품(地品)이 각각 달라서 거기에 알맞은 산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고장에서는 잘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있고, 다른 지방에서 비록 산출되더라도 맛이 특별한 경우가 있으니, 이를 그 지방의 특산물 또는 토산물이라 한다. 때문에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서는 각 지역의 토산물을 공물로 지정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渡淮而爲枳)”라는 말도 있다.
과천의 토산물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먼저 과천의 자연 환경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기록들이 있다.

形勝 山連冠岳 水下淸溪

山川 冠岳山(在縣西五里鎭山) 淸溪山(在縣東八里一名淸龍山) 修理山(在縣南十四里) 露梁津(在縣北二十里) 公需川(在縣南一里) 仁德院川(在縣南十四里) 鶴古介川(在縣西十九里)(『新增東國輿地勝覽』 卷8, 果川縣條)

形勝 山連冠岳 水下淸溪 北有狐峴之圍 南有葛山之阻 列岳屛峙於前 長江橫帶於左

山川 冠岳山在縣後一名小金剛 淸溪山在縣東南間八里一名淸龍山 修理山在縣南二十五里一名見佛山 牛眠山在縣東北間五里 太乙山在縣南二十里 公需川在縣南一里 仁德院川在縣南十四里 鶴古介川在縣西十九里 安陽川在縣西二十里 軍浦川在縣南二十里 僧房川在縣北十三里 菊逸川在縣東二十里 (『果川邑誌』, 山川形勝條)

위의 자료를 통하여 알수 있듯이 과천의 앞에는 여러 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큰 산 사이에는 맑은 내들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서울시가 된 동작동·흑석동·사당동·방배동·반포동·서초동 등이 조선시대에는 모두 과천현에 속하였다. 따라서 과천현은 경지가 협소하고 토질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발달하기에는 부적당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그 토양은 척박하다(其土瘠)”든지 『과천읍지』에서 “풍습은 농사일에 게을러서 백성들 가운데 부자가 없다(風習懶於農業 民無富戶)”라든가, “그 곳은 두 태산 사이에 끼어서 지역이 협소하고 토양은 척박하여 경기내의 박읍(薄邑)이다(其處兩泰山之間 而壤地偏小 土性又瘠 畿內中薄邑)”라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 2. 특산물의 내용

이와 같은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결정된 과천의 토산물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조선 초기부터 그 내용이 전하고 있으며, 조선조 500년 동안에도 처음에는 특산물이었다가 제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특산물 중에는 공물로써 중앙 관청에 바쳐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어느 특산물을 어느 관청에 얼마만큼 바쳤는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특산물에 대해 기록된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土宜: 五穀(벼·보리·콩·조·기장)·栗(밤)·小豆(팥)·메밀(蕎麥)·胡麻(깨)·桑(뽕나무)·麻(삼)
土貢: 眞茸(녹용)·芝草(영지버섯)(『세종실록』 지리지 果川縣條)
土産: 栗(밤)·蒼朮(창출, 사초뿌리)·訥魚·錦鱗魚·(금붕어)·蟹(게) (柳馨遠, 『東國輿地志』 果川縣條)
土産: 租(조)·豆(콩)·太(큰콩)·黍(메기장)·粟(조)·稷(차기장)·大麥(보리)·小麥(밀)·蕎麥(메밀)·糖水荏(들깨)·菉豆(녹두)·棗(대추)·栗(밤)·?蕨(고비와 고사리)·靑菓·眞菓·牛(소)·馬(말)·鷄(닭)·犬(개)·猫(고양이)·白魚(뱅어)(『果川邑誌』 土山物條)
土産: 河豚(복어)·白魚(뱅어)·紫蟹(자주빛 게)(『輿地圖書』 果川縣條)
土産: 白魚(뱅어)·蟹(게)·栗(밤)·白土(흰흙)·鯉魚(잉어)(金正浩, 『大東地誌』)

【사진】『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志)』(1699) 토산물조(土産物條)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誌)』(1699) 토산조(土産條)에 따르면, 과천의 토산물에는 밭작물·약재·과수·어류 등이 있다. 즉,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논농사가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밭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주위의 산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약재류와 밤 등이 있다. 그리고 한강에서 산출되는 어류가 있다. 과천의 산물, 직업 등 일반생활은 산과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세종 26년(1444)에 편찬된 것으로 국가에 바치는 토공은 고려시대의 토공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조선시대에는 무엇을 공물로 바쳤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밭작물 등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특별히 특산물이라고 할 성질은 아니며, 이 보다는 산에서 채취하는 약재와 밤이 주목된다.

○ 1) 약재
○ 2) 밤
▣ 1) 약재(藥材)

(1) 창출(蒼朮)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과천의 공물은 녹용과 영지버섯이고, 『여지도서』에는 창출이 토산물에 들어 있어, 약재류가 많이 생산됨을 알 수 있다.
창출은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풀인 삽주의 뿌리 줄기를 말린 것으로 우리나라 각지에서 자란다. 『동의보감(東醫寶鑑)』탕액편에 의하면 창출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고 매우며 독이 없다. 비장을 든든하게 하고 위를 튼튼하게 하며 설사를 방지한다. 습기를 제거하고 소화를 잘 되게 하며 땀을 멈추게 한다. 심장 아래가 갑자기 팽창하는 것과 토하고 설사하는 것을 제거하고 요제간혈에 좋을 뿐아니라 위가 허하고 찬 병을 치료하는데 좋다. ” 따라서 위병·소화장애·설사·감기·비만증·뼈마디아픔·붓는데·야맹증 등에 효과가 있는 약재이다.

(性)溫味苦幸無毒 建脾强胃止瀉 除濕消倉止汗 除心下急滿及藿亂吐瀉 下止利腰臍間血 療胃虛冷?

(2) 녹용(鹿茸)
창출이 야생의 약초이듯이 녹용도 사육하는 사슴이 없었을 당시 이 지방에서 야생 사슴이 산에서 얼마나 서식하고 있었으며 언제까지 특산물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녹용이 조선 초기에는 특산물로 기록되었는데 반해 17세기 이후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보다 앞서 사슴이 이 지역에서 멸종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녹용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사슴의 어린 뿔을 채취하여 가공한 것이다. 『동의보감』 탕액편에 의하면 녹용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새콤달콤하다(쓰고 맵다고도 한다). 허하고 피로함과 사지·허리·등뼈의 절임증을 치료한다. 남자의 콩팥이 허하고 무릎·다리에 힘이 없을 때 보양한다. 밤에 악몽을 꾸며 정신이 약해졌을 때나 여자의 대하증에 효과가 있고 태(胎)를 튼튼하게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전신강장약으로 건강한 사람이 복용하면 신체강장과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 어린아이의 경우는 발육을 촉진하고 저항력을 증강할 수 있으며, 청장년의 경우에는 건강 유지에 좋고, 중년인 사람이 복용하면 강장과 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 노인에게는 신체의 약한 부분을 보하고 전신을 따뜻하게 한다.

性溫味甘酸(一云苦幸)無毒療虛勞羸瘦四肢腰脊틹+酸疼 補男子腎虛冷脚膝無力 夜夢鬼交泄精 女人崩中漏血及赤白帶下 能安胎草本

그리고 녹용에는 많은 양의 호르몬과 발정 호르몬이 함유되어 있어서 성기능 감퇴에 흥분 작용이 있다. 연령은 아직 늙지 않았는데 남성의 경우 양위(陽츁)하거나 여성의 경우 냉감증(冷感症)이 있을 때, 녹용을 분말 또는 환약으로 만들어 상복하면 효과가 있다. 정신피로·몸이 마른·사지냉감(四肢冷感)·요퇴냉통(腰腿冷痛)·식욕부진·불면증 증세가 있을 때 녹용에 황기·인삼 등을 배합하여 달여 마시면 좋다.
특히, 부인들의 생리와 출산으로 체력이 소모되었을 때와 중병 및 대수술 뒤에 복용하면 좋다. 습관성 유산이 있는 임산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 체질이 허약한 임산부의 경우 녹용을 복용하면 모체에도 유익하고 태야에게도 영양을 주어서 발육을 촉진한다.【주】1)
녹용이 들어가는 대표적인 한약 처방의 하나가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이다. 녹용대보탕은 허로소기(虛勞少氣)와 일체의 허손(虛損)을 다스리는 처방으로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는 태음인(太陰人)에게 한정한다. 이 처방은 중국 『의학입문』에 최초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의보감』·『제중신편(濟衆新編)』·『방약합편(方藥合編)』등에 수록되어 있고 『동의수세보원』에는 처방 내용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주】2)

(3) 영지버섯(芝草)
영지버섯은 『동국여지승람』에 공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17세기 이후의 읍지류에는 토산물에서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지버섯이 이미 과천의 특산물에서 소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물로 바쳐야 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기 이전까지는 다른 지방에서 사다 바쳐야 하는 괴로움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지버섯은 불로초라고도 하며 버섯의 일종이다.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나오지 않지만, 동물 실험 결과 진통 효과가 뛰어나고, 진해·거담·천식에 효과가 있다. 그리고 장관(腸管)이나 자궁에 대하여도 현저한 억제효과가 있다. 강심효과가 뛰어나고 간장내에서의 단백질 합성을 촉진시키며 면역성을 증강시킨다.
따라서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긴장감, 심장 부위의 통증·부종, 만성기관지염이나 고산병에 효과가 있다. 이 밖에도 만성감염·신경쇠약으로 인한 불면증, 뇌세포 발육부전증·백혈구 감소증·시망막 색소변성·퇴행성 영양불량·위축성 근육강직증·골절증식 등에 고루 작용할 뿐만 아니라 항암작용과 알레르기성 질환에도 효과가 있다.【주】3)

▣ 2) 밤

밤나무는 참나무과의 교목성 낙엽과수로 높이는 보통 10∼15m이다. 밤나무 생장에 알맞은 조건은 연평균 기온 10∼12°C, 4∼10월의 평균 기온 16∼20°C, 연강수량 1,000∼1,500㎜의 산록이다. 어린 나무는 영하 15∼16°C에서 피해를 받지만 다 자란 나무는 -20°C까지도 견딘다. 토질은 배수가 잘되고 유기질이 많으며 표토가 깊을 수록 좋고, 산도는 pH5∼6이면 적합하다. 그리고 다른 과수에 비하여 조방적인 재배 관리가 가능하고, 경사가 급한 지형에서도 비교적 용이하게 재배할 수 있으며, 수송 및 저장성이 크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한 산간지에서 유리하게 재배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밤나무 재배가 가능하지만, 특히 경기도와 강원도 일원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밖에 경상남도의 하동·함양·산청, 전라남도의 광양·보성·구례, 전라북도의 남원·장수 등 주로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주】4)
특히, 과천은 밤[栗]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고장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과천현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果川縣 本高句麗栗木郡 新羅改爲栗津郡 高麗改爲果州 顯宗戊午屬廣州任 內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果川縣監 別號富林

이와 같이 과천의 본래 이름이 율목군, 율진군이었다는 사실이 이 고장에서 밤이 많이 생산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명칭인 과주나 별칭이었던 부림, 현재에도 쓰이지만 조선시대에 처음 붙여진 명칭인 과천 역시 밤과 관련된 명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과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밤이라 하여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우리나라 밤의 종류는 크게 밤나무(栗木: Chosen-guri), 약밤나무(藥栗木·咸從栗·平壤栗: Shina-guri), 산밤나무(山栗: Shinba-guri)로 분류되는데,【주】5) 함경북도와 평안남도는 중국계의 함종율이 많이 재배되고, 그 이남 지역에서는 대부분 고유의 재래종 율목(栗木)이 재배되었다.【주】6) 과천의 밤나무는 중국에서 유입된 함종율이 아닌 토종 율목에 해당한다.
토종 율목은 함종율에 비하여 크기가 굵고 맛도 달아서 예로부터 중국에까지 유명하였다. 예를 들면 『후한서』 동이전, 마한조에는 “배만큼 큰 밤이 난다(出大栗如梨)”고 하였고, 『시경』 소(疏)에는 “왜(倭)와 한(韓)의 밤이 달걀만 하다”고 하였다. 고려에 온 중국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토산조에서 “밤이 복숭아 처럼 크고 맛이 달아서 입맛을 당긴다(栗大如桃 甘味可愛)”고 고려의 밤을 감탄하기도 하였다.
특히, 과천의 밤은 일찍부터 이름이 나서 밤나무 관리를 위한 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과천에는 장원서(掌苑署)의 경외과원(京外果園)이 설치되어 야생 밤의 채취를 비롯하여 인공 재배도 하였다. 그리고 과천 백성들은 밤나무 재배, 관리를 위하여 다른 잡역은 면제받았다.【주】7)
이와 같이 과천은 산이 많은 지형으로 밤을 재배하기에 좋은 자연 조건을 갖추었고 기후도 밤나무가 자라기에 적절하여 옛부터 과천의 밤은 유명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하여 밤의 재배가 급격히 줄어든 상태이다.
『동의보감』 탕액편에 밤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짜고 독이 없어, 기를 북돋아주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콩팥의 기운을 도와주며, 배고픔을 견디게 하기 때문에 여러 과일 중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 곧 밤(果中栗最有益)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밤을 도자기 그릇에 넣어 흙 속에 묻어주고 사철 먹었을 뿐만 아니라 주식의 재료로도 사용하였는데, 밤밥이 대표적인 예이다. 밤밥을 만들 때는 생밤의 껍질을 깨끗이 벗겨 반으로 가르고 색이 변하지 않도록 뜨물에 담가둔다. 이것을 쌀과 섞어 소금을 약간 뿌린 뒤 보통밥을 짓듯이 하면 된다. 이 때 팥 삶은 물을 붓고 지으면 색이 고울 뿐 아니라 구수한 맛도 즐길 수 있다. 밤밥은 비타민C가 많이 함유되어 특히 야채가 귀한 겨울철의 주식으로 좋다.【주】8)
밤가루와 쌀가루를 섞어 죽을 끓이면 밤죽이 되는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등에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만드는 법은 쌀가루로 죽을 끓이다가 밤가루를 함께 넣고 고르게 섞으면서 끓이는데, 밤가루와 쌀가루의 비례는 2: 1 정도가 적당하다. 밤죽은 당분이 많아 건강식으로 좋다. 그리고 젖먹이 아이의 이유식으로도 알맞아, 밤가루를 밥물에 풀어 끓이거나 밤가루와 쌀가루를 섞어 암죽을 끓여 먹이면 좋다.【주】9)
약식에도 밤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조리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찹쌀을 쪄서 밥을 만들고 여기에 참기름·꿀·진간장을 넣는다. 밤은 껍질을 까고 대추는 씨를 발라내어 잘게 썰어 위의 재료와 섞어서, 이를 다시 푹 찐다. 이것을 약밥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사금갑(射琴匣)의 이변을 알려준 까마귀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만든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주】10)
이와 같이 밤은 여러 과일 중 으뜸이 되는 소중한 과일의 하나였으며, 특히 제사상이나 결혼·회갑·진갑·돌맞이 등의 상이 아무리 소략하여도 반드시 올려야 하는 과일이었다. 그러므로 과천의 밤은 서울 양반가의 잔치 및 제수용의 과일로서 값진 특산물이었고, 정월 보름날에 먹는 부럼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밤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원효는 그 어머니가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분만하였는데 이 나무의 밤 크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절의 노비에게 저녁으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노비가 관에 소송을 하였는데, 관리가 사실을 확인해 보니 밤 한 알이 한 바리가 가득찼다. 그래서 관에서는 도리어 노비에게 밤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하였다는 것이다.【주】11)
이 밖에 뱅어·게·잉어 등은 맑은 내나 한강에서 잡았을 것으로, 이는 매운탕의 재료로 쓰인다. 더구나 과천을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에 왕래하거나 관리들이 지방으로 부임 또는 회환할 때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로였으므로, 이러한 생선 매운탕은 한양을 지나는 과객들이 시 한수를 읊으면서 술을 마실 때 안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집필자】 鄭求福


▣ 제3절 역참제도(驛站制度)

역참(驛站)이란, 역과 참의 기능을 함께 하는 복합어(複合語)로서, 전통시대의 교통통신 기관이다. 즉 역마(驛馬)를 갖추어 관리나 사신 왕래에 따라 마중나가고 배우하는 일(迎送)과 접대를 돕고,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릴레이식 전달(遞送)을 담당하는 것이 역이고,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의 릴레이식 전달을 위해서 설치된 것이 참인데, 대개 같은 곳에서 일을 보았다. 따라서 그 명칭도 역참(驛站)·참역(站驛)·역정(驛亭)·역체(驛遞)·역전(驛傳)·우역(郵驛)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와 같이 역참제의 운영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 나가는 기능뿐 아니라,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육로에서는 역참(또는 참역) 또는 우역이 설치되었고, 내륙수도(內陸水路)나 조운로(漕運路)에는 수참(水站)이 설치되어 효과적인 교통통신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역참제
○ 2. 고려시대의 역참제
○ 3. 조선시대의 역참제도
○ 4. 과천소관의 역원과 역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