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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先史)·고대(古代)  지명유래(地名由來)  삼국시대 
인구의 변천과 면적  고려시대  광복 직후의 행정구역 
조선전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과천의 분리지역 
근(近)·현대(現代)  조선후기 

지명유래(地名由來)
▣ 제1장 지명유래(地名由來)

○ 제1절 과천의 옛 지명
○ 제2절 과천지명의 개요
▣ 제1절 과천(果川)의 옛 지명(地名)

○ 1. 동사힐
○ 2. 율목
○ 3. 율진
○ 4. 과주·과천·금과

▣ 1. 동사힐(冬斯?)

과천은 삼국시대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장수왕의 남하(南下)로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당시의 지명은 ‘동사힐(冬斯?)’ 또는 ‘율목(栗木)’이었다. 이 지명들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 율진(栗津)으로 바뀌었고, 고려초(940)에 과주(果州)로 개명되었다.
고구려 당시(475∼551년) 율목군(栗木郡)의 영역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즉, 지금의 과천시는 물론이고, 안양시(석수동·박달동 제외)·군포시, 서울특별시 관악구의 남현동, 동작구의 노량진동·본동·동작동·사당동·흑석동, 서초구의 반포동·반포본동·방배동·서초동·우면동·잠원동 등과 용산구 일대가 모두 고구려 시대의 율목군의 영역이었다.【주】1)
‘동사힐’이란 지명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온 바가 있으나, 아직 공통적인 의견으로의 접근은 되지 않고 있다. 그 주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를 ‘돗떍ⅰ??보는 학자가 있다. ‘동사(冬斯)’를 ‘돗(돋)’의 음차(音借)로 보고, ‘힐(?)’을 고구려말의 ‘흘(‘고을’의 뜻)’로 보아 ‘골’로 취해 ‘돋골’, 즉 ‘해 돋는 고을’의 뜻으로 매겨진 땅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무리가 따른다. ‘해 돋는 고을’의 뜻을 담는다면 여기서의 중심말이 ‘해’이기 때문에 ‘햇골’이 되지 ‘돋골’이 될 뚜렷한 이유가 서지 않는다. 또 ‘해’의 옛말이 ‘하’이기 때문에 옛말로 본다면 ‘햇골’이 아닌 ‘핫골’이 되어야 한다.
‘동사힐(冬斯?)’이 ‘돗늒골(도사골)’의 음차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주】2) 여기서의 ‘돗’을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고 있다. ‘돗’을 ‘돋음[出]’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돗늒골’은 ‘돗골(돋골)’과 같은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돗’을 단순히 지형상의 의미로 보아 ‘도드라진 곳’의 뜻을 지녔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우리 땅이름은 지형의 개념 안에서 붙여진 예가 많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 견해는 상당한 합리성을 지닌다. ‘돗(돋)’은 또 산의 오랜 옛말인 ‘닷(닫)’과도 음이 비슷해 ‘돗골’이나 ‘돗늒골’은 ‘산이 많은 고을’의 뜻이 아닌가 여겨지게도 한다.
돗(山) + 늒(의) + 골(州)
삼국시대의 땅이름에 ‘동(冬)’이 많이 나오는데, 이 한자는 주로 ‘도’ 또는 ‘두’의 음차로 많이 쓰인 듯 하다.【주】3)

冬老→두로(지금의 전남 장흥 일부)
冬忽→돗골(지금의 황해도 황주)
刀冬火→도듯벌(지금의 경북 영천 일부)
未冬夫里→미돗부리(지금의 전남 나주 남평면)
冬音→두음·둠(지금의 전남 강진)

어떻든 ‘동(冬)’이 산(山)의 옛말인 ‘돋(닫)’ 또는 ‘둠(두미·두메)’과 연관된 지명임은 확실한 듯한데, 이것은 아마도 과천 일대가 관악산, 청계산 등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땅이름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게 한다.

▣ 2. 율목(栗木)



(박성환 작),
【사진】밤나무골 과천풍경(果川風景)



‘율목(栗木)’이란 땅이름 역시 고구려 시대의 땅이름이다. 한자 뜻 그대로라면 ‘밤나무’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해서 과천의 옛 땅이름이 ‘밤나뭇골(밤나모골)’로 보는 것은 그 글자에 빠져 쉽게 땅이름 풀이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학자 서정범(徐廷範)은 ‘율목(栗木)’의 ‘목(木)’을 ‘걸’ 또는 ‘글’로 풀면서 이것은 ‘동사힐’의 ‘힐’, 과천의 통일신라시대 지명인 ‘율진(栗津)’의 ‘진(津)’과 대응된다고 하였다.【주】4)
‘목(木)’을 ‘글(걸)’로 보는 것은 지금의 말 ‘그루(株)’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즉, ‘그루’는 원래 ‘글(걸)’의 음을 그 뿌리로 하기 때문이다. ‘글’은 원래 ‘나무’를 뜻하는 옛말로, ‘긋(귿)’이 개음절화(開音節化)한 말로 보고 있다. 요즘 말의 ‘기둥’이란 말은 ‘긷’을 그 뿌리로 하는데, ‘목제(木製)’의 뜻을 지니고도 있는 이 말도 ‘그루’와 어원을 같이하는 말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국어의 ‘긷’은 일본어 ‘키(木)’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진(津)’을 ‘목(木)’과 대응되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진(津)’이 ‘천(川)’, ‘양(梁)’의 훈(訓)으로 보면 ‘걸(거랑)’이고, 이것이 ‘글·그루’의 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면, ‘율목(栗木)’과 ‘율진(栗津)’은 ‘밤글’ 또는 ‘밤걸’을 한자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율(栗)’을 훈차(訓借)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음차한 것으로 본다면 ‘율걸(율글)’, ‘눌걸(눌글)’로 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길이 없다. 또 ‘율(栗)’의 옛 음이 ‘늬’인 점을 생각한다면, ‘늣걸’ 또는 ‘냇걸’일 가능성도 있다.
‘율목(栗木)’을 ‘밤나미’의 훈차로 보는 학자도 있다.【주】5) 그리고 그 ‘밤나미’는 ‘받나미’의 전음(轉音)으로 보고, 이를 ‘산 넘음’의 뜻으로 보았다.

받(山)+남이(踰)=받남이
받남이>받나미>반나미>밤나미

‘남이’나 ‘넘이’는 ‘넘음(踰·餘)’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의 ‘남이(나미)’가 ‘나무’의 옛말 ‘남’ 또는 ‘나모’로 대역되면서 ‘목(木)’으로 취해졌다는 주장이다. ‘받’이 ‘밤’의 뜻인 ‘율(栗)’로 된 것은 그 뒤에 따르는 ㄴ음의 영향으로 자음동화하여 일어난 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율목(栗木)’은 ‘산을 넘음’의 뜻인 ‘받남이’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인데, 필자도 여기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주】6) 과천 고을은 남태령과 같은 큰 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곳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 생각된다.
‘율목(栗木)’을 ‘밤나모’로 의역(意譯)해서 ‘밤나뭇골’ 즉 ‘밤나무가 많은 고을’로 해석하는 이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과천에는 지금도 밤나무가 많지만 옛날에도 밤나무가 많았었다는 여러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1950년대 초만 해도 당시 과천면 곳곳 웬만한 언덕·등성이·산기슭 등에는 밤나무 숲이 가득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의 밤나무들은 고구려 때부터 그렇게 무성했던가? 만일, 그렇다면 당시부터 그런 뜻으로 ‘율목(栗木)’이란 지명으로 붙여졌을 가능성도 있다.【주】7)


▣ 3. 율진(栗津)

고구려 때 ‘율목(栗木)’ 또는 ‘동사힐’현이었던 과천은 신라 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 율진군(栗津郡)이 된다.【주】8)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율진(栗津)’의 ‘진(津)’을 ‘걸’로 본다면 ‘율진(栗津)’은 ‘밤걸’이 된다.
‘진(津)’이라고 하면 적어도 배로 건너야 할 만한 나루를 말하는데, 과천에는 그럴 만한 하천이 없다. 그러나 과천의 영역이 옛날엔 한강 너머 현재의 용산 일대까지 닿아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 전까지의 이름이었던 ‘율목(栗木)’의 ‘율(栗)’자에 ‘목(木)’자 대신 ‘진(津)’자를 취해 넣은 것이 아닌가 여겨지게도 한다.


▣ 4. 과주·과천·금과(果州·果川·衿果)

통일신라시대에 율진군(栗津郡)이었던 과천은 고려초(940)에 이르러 과주군(果州郡)으로 고쳐진다. 그리고 8대 현종 9년(1018)에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고 조선 3대 태종 13년(1413)에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
그러던 과천은 태종 14년(1414)에 금천(衿川: 시흥)에 병합되어 금과(衿果)라 하다가 두어 달만에 복구된다. ‘금과(衿果)’는 ‘금천(衿川)’의 ‘금(衿)’자와 ‘과천(果川)’의 ‘과(果)’자를 각각 따서 붙여진 지명이다.
7대 세조 때도 금천을 합하였다가 또 얼마 안 가서 복구하였으며, 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군(郡)이 되었다. 고종 때의 과천군은 군내면(郡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상서면(上西面)·하서면(下西面)·상북면(上北面)·하북면(下北面) 등 7개 면을 그 관할 아래 두었다.【주】9)
일제 때인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그 동안 군(郡)이었던 과천군은 면으로 격하되어 과천면(果川面)이 되고 시흥군에 흡수되었다.【주】10
1982년부터 정부제2종합청사와 과천 서울대공원이 들어앉게 되었고, 1986년 1월 1일부터 시(市) 로 승격, 과천시(果川市)가 되었다.
‘과천(果川)’이란 이름은 조선초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니, 그 역사로 보아서 약 6백년 동안을 써 온 셈이다. 이 이름은 그 전의 이름인 ‘과주(果州)’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과주(果州)’는 새로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전의 이름인 ‘율진(栗津)’을 큰 고을이면서 과일(果)의 고을 이름답게 다듬은 지명으로 생각된다. 과천은 밤나무도 많지만 감나무도 퍽 많았다. 관악산과 청계산에 감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한 과천은 그 지형적인 좋은 조건 때문에 과일나무들이 잘 되었다.

▣ 제2절 과천지명(果川地名)의 개요(槪要)

○ 1. 개요
○ 2. 과천의 지명특색
○ 3. 과천의 옛 행정영역
○ 4. 과천의 법정동
○ 5. 과천의 자연마을
○ 6. 과천의 산
○ 7. 과천의 하천
○ 8. 과천의 들
○ 9. 과천의 골짜기
○ 10. 과천의 고개
○ 11. 과천의 바위
○ 12. 기타
▣ 1. 개요(槪要)

지명(地名) 즉, 땅이름은 글자 그대로 ‘땅의 이름’이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듯이 땅 곳곳마다엔 땅이름이 있다. 사람의 이름을 비롯한 모든 고유명사가 그렇듯 지명도 일종의 고유기호라 할 수 있다. 즉, 알기 편하고 불리기 쉽도록 정해진 축약된 기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땅이름은 조상에 의해 붙여졌으므로 이것을 조사·연구하면 조상의 생각에 접할 수 있고, 역사나 조상들의 의식구조의 일면도 알 수 있으며, 전통이나 풍습을 이해하는 데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특히 지명 중에는 그에 마땅한 내력이나 전설·설화가 얽힌 것도 많아 이 속에서 조상의 훈훈한 얼과 통할 수 있다. 또한 지명 속에는 각 지방 특유의 방언이나 옛말[古語]이 숨어 있기도 해서 지방말이나 옛말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런 뜻에서 볼 때 본디의 지명은 사라져서도 아니 되고 함부로 고쳐져서도 아니 된다.
근래에 와서 각 국에선 지명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인식, 이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명학(地名學)’이란 분야까지 새로이 개척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방면에 지극히 무심해 왔고 지금도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가 그다지 많지 않다.【주】11)
특히 현재의 우리나라 지명들을 살펴보면 뜻을 알 수 없이 애매하게 변해 버린 것이 있는가 하면 지명을 붙이게 된 기회나 까닭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또 지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빈약한 문헌이나 구전 등에 의해 적당히 추리·연구·기술된 것이 많아 일관된 학설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명에는 나라 안에서만 보더라도 ‘경기도’, ‘과천시’같은 큰 지역명이 있는가 하면 ‘새술막’, ‘연주대’ 같은 좁은(작은) 지역명이 있다.
“우리나라의 총 지명수는 얼마냐?”
“과천시의 총 지명수는 얼마냐?”
이 물음에 대해서는 확실히 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산·내·바위·골짜기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나 마을·절·다리·터널 등의 인위적인 것이나 이름이 붙은 것은 모두 다 지명이라 할 수 있어 지명은 붙이기 나름과 쓰기 나름으로 그 수가 각각 달라지기 때문이다.
과천시의 지명만 보더라도 ‘막계동(莫溪洞)’·‘문원동(文原洞)’과 같은 법정동명이 있는가 하면 ‘중앙동(中央洞)’·‘과천동(果川洞)’과 같은 행정동명이 있고, ‘능어리’,【주】12) ‘가는골’과 같이 지도에도 잘 표기되지 않은 채 불리기만 하는 지명도 있다. 그리고 같은 지역만 보더라도 ‘배랭이’와 ‘별양(別陽)’, ‘안골’과 ‘내곡(內谷)’과 같이 오래 전에 불리던 지명과 현재에 불리는 지명이 따로 있는 곳도 아주 많다. ‘건너말’, ‘고개밑’, ‘내깨(냇가)’와 같이 지명이랄지 아니랄지 구분하여 말하기 어려운 것도 상당수 있고, 개발에 밀려 큰 건물이나 주택지에 묻혀 버려 ‘새술막’【주】13)·‘비선거리’【주】14)와 같이 지금은 막연히 어디 쯤으로 통하고 있는 지명도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명에 대한 연구이다.
지금까지는 지명에 좀 관심있는 학자라도 글자풀이 중심의 지명 연구를 많이 해 왔다. 그러나 지명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명을 단순히 현재에 나타난 글자에 맞출 것이 아니라 옛말·우리말의 변화 과정·음운·방언·역사성·다른 지명과의 유관 관계 등을 살펴 그 지명이 형성되기까지의 정황을 복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지명이 가진 뜻이나 정착 과정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천시 문원동(文原洞)에 있는 ‘다락터’의 예를 들어 보자.
단순히 현재 지명 글자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락터’를 글자 그대로 ‘다락+터’ 즉, ‘다락이 있는(있었던) 터’의 뜻으로 새긴다. 그리고는 이것의 한자 지명인 ‘누기(樓基)’에 맞추면서 그 확신을 더욱 굳힌다. 지명 풀이의 함정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산지에 공통적으로 많이 분포한 이 ‘다락터’ 지명이 모두 ‘다락이 있는’ 곳으로만 알다가는 큰 오류를 범한다.
다락터는 달리 다라터 다래터 달터 등으로도 불리기도 했는데, 같은 뜻의 비슷한 땅이름으로 다라실 다래실 다래울 등도 있었다. 전국 곳곳의 누기(樓基) 외에 다라(多羅) 다래(多來) 월기(月基) 등의 한자식 지명은 이들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주】15)
‘다락터’와 ‘달터’는 같은 지명임에도 한자로는 전혀 다른 뜻의 글자로 표기되고 있지 않은가. ‘다락터’는 ‘달’과 ‘터’라는 두 명사 사이에 ‘늒’라는 소유격조사가 들어가 이루어진 말이다.

달늒터>다굊터(다라터)>다락터

‘달’은 ‘산(山)’의 옛말이다. 따라서 ‘달늒터(다라터)’는 ‘산(山)의 마을’ 즉, 산촌(山村)의 뜻이 된다.
따라서 땅이름 연구에 있어서 지금의 글자로 나타나 있는 그 지명만을 보고 그 글자대로 뜻풀이를 해 내려는 잘못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 2. 과천(果川)의 지명특색(地名特色)

과천에는 산이 많고 들이 그리 넓지 않은 관계로 산지 지명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특히 관악산 기슭과 청계산 기슭, 그리고 그 골짜기마다엔 산지 관련 지명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많던 지명들도 도시화에 따른 개발, 생활 여건의 변화 등으로 이 곳에 오랫동안 터박아 살아 왔던 토박이들이 거의 다 떠나감에 따라, 그들에게서 익히 불리던 땅이름들이 차츰차츰 불리지 않게 되면서 많은 지명들이 우리 곁에서 떠나갔다. 예를 들면 옛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니던 관악산의 많은 골짜기들, 그 골짜기마다 있는 많은 바위들 이름이 하나하나 잊혀져 간 것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시기를 과천의 향교말과 홍촌말 등에서 보냈는데 당시 이 곳의 원주민들은 관악산 곳곳의 많은 지명들을 알고 있었고 특히 골짜기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세세히 알고 있어 나무하려 올라가거나 하면 ‘∼골’, ‘∼굴’ 식의 골짜기 이름들을 말하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명들은 지도나 문헌 등에 기록이 되지 않고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나 불리어 오던 것이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원주민들이 많이 떠나간 데가가 세대 교체와 직업의 전환 등으로 산을 오를 일이 별로 많지 않게 되자, 그러한 골짜기·바위·등성이 이름들을 부를 기회가 별로 없게 되면서 하나하나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과천에서 산지 지명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관악산 기슭인 갈현동(葛峴洞)과 문원동(文原洞) 일대, 남태령(南泰嶺) 밑인 과천동 일대, 청계산 골짜기인 막계동(莫溪洞) 일대, 그 북쪽 기슭인 주암동(注岩洞) 일대에 많이 퍼져 있다.

▣ 3. 과천(果川)의 옛 행정영역(行政領域)

○ 1) 삼국시대
○ 2) 통일신라시대
○ 3) 고려시대
○ 4) 조선시대
○ 5) 일제강점기
○ 6) 광복 후 현재까지

▣ 1) 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시대엔 고을과 고을 사이의 땅 경계가 오늘날과 같이 뚜렷하지 않았다. 어느 고을[郡·縣]이라고 하면 읍내(邑內)와 같은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진산(鎭山)의 산줄기를 따라 이루어지는 일정 지역이 대략 그 영역이 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따라서 동사힐(冬斯?) 또는 율목(栗木)으로 불렸던 고구려 시대의 과천(果川) 영역이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정확히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 경덕왕 때(757) 율목군을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율진군이었던 곳이 그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될 뿐이다.


▣ 2)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고구려 땅이었던 과천은 신라가 문무왕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그 관할 안에 들어가게 됐다. 『삼국사기』 권 35에 보면 ‘율진군(栗津郡)은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인데 (『삼국사기』가 간행된 고려시대에는) 과주(果州)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 속한 영현이 곡양현(穀壤縣)·공암현(孔巖縣)·소성현(邵城縣) 등 셋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과천(果川: 栗津郡)은 상당히 큰 영역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곡양(穀壤)은 현 서울특별시 구역중 구로구의 가리봉동·구로동·독산동·시흥동·신도림동과 관악구의 봉천동·신림동, 동작구의 상도동·대방동·신대방동, 영등포구의 당산동·대림동·도림동·문래동·신길동·양평동·양화동, 그리고 경기도의 광명시(옥길동 제외)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이것만으로도 무척 넓은 지역이다. 공암(孔巖)【주】16)은 지금의 서울 강서·양천구 일원이며, 소성(邵城)【주】17)은 인천시와 부천시 일부및 시흥시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당시 율진군(栗津郡)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군으로는 남쪽으로 수성군(水城郡: 지금의 수원시), 당은군(唐恩郡: 지금의 화성군)이 있었고, 북쪽으로 한양군(漢陽郡: 지금의 서울·광주·양주·고양)이 있었다. 또 동쪽으로는 소천군(?川郡: 지금의 광주·여주)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안산군(安山郡: 지금의 안산시·시흥시 일부)과 장제군(長堤郡: 지금의 부평·김포)이 있었다. 이러한 지역 분포로써 당시 율진군(栗津郡)의 영역도를 그려 보게 된다면, 북쪽은 한강, 남쪽은 수원과의 경계, 동쪽은 광주와의 경계, 서쪽은 안산까지 이르게 되는 넓은 지역이 된다.


▣ 3) 고려시대(高麗時代)

통일신라시대에 율진군(栗津郡)이었던 과천은 고려초에 과주(果州)로 되면서 그 영역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성종 14년(995)에 곡양(穀壤: 고려초에 衿州로 개칭 됨)에 단련사(團練使)가 설치되어 떨어져 나갔고, 현종 9년(1018)에는 공암(孔巖)이 떨어져나가 수주(樹州: 富平府)에 속하게 되었으며, 소성(邵城) 또한 현종 9년에는 수주에 속하였다가 숙종대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어 과천의 영역이 좁아지게 되었고, 광주(廣州)가 목(牧)이 되면서 여기에 속하게 된다. 그후 충렬왕 10년(1284)에 다시 한강 북쪽의 용산처(龍山處)가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됨에 따라 과천의 영역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 4) 조선시대(朝鮮時代)

고려 현종대에 광주 땅에 붙여졌던 과천은 그 후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가 조선 3대 태종 13년(1413)에 과천현(果川縣)이 되면서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로 변한다. ‘과천(果川)’이란 지금의 땅이름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과천현 영역은 지금의 과천시 일대와 안양시·군포시 및 서울특별시 구역중 서초구의 반포동·반포본동·방배동·방배본동·서초동·양재동·우면동·잠원동 등과 동작구의 상도동·노량진동·본동·사당동·흑석동·동작동, 관악구의 남현동 등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역은 몇 번의 합병·분리(독립) 과정을 잠시 거쳤을 뿐 1914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과천현의 영역은 순조 34년(1834)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청구도(靑邱圖)」와 이것을 발전시켜 철종 12년(1861)에 만든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도 잘 나타난다. 특히 「대동여지전도」에는 과천현의 영역이 점선으로 뚜렷이 그려져 있는데, 동쪽은 우면산(牛眠山)에서 청계산(淸溪山)에 이르는 곳, 남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 일대와 군포시(軍浦市)를 포함한 지역, 북쪽으로는 서울 노량진(露梁津)·동작동(銅雀洞) 등을 포함하는 한강(漢江) 이남의 넓은 지역으로 나타난다.
과천은 조선 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해 군(郡)이 되는데, 당시 관할 안의 7개면은 다음과 같았다.

▶ 군내면(郡內面): 현 과천시 일대
▶ 동면(東面): 현 서울 서초구 양재동·우면동·원지동·서초동, 과천시 주암동 일대
▶ 남면(南面): 현 군포시 일대
▶ 상서면(上西面): 현 안양시 동안구(호계동 제외) 일대
▶ 하서면(下西面): 현 안양시 만안구(석수동·박달동 제외) 일대
▶ 상북면(上北面): 현 서울 동작구 동작동·사당동, 서초구 반포동·잠원동·방배동 일대
▶ 하북면(下北面): 서울 동작구 흑석동·노량진동·본동 일대

일제가 군·면을 폐합한 1914년 3월 이전까지는 지금의 과천시가 과천군(果川郡) 군내면(郡內面)【주】18)이었는데, ‘군내(郡內)’라는 지명은 ‘군(郡)의 읍내(邑內) 일대’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당시 군내면은 관문(官門)·문원(文原)·갈현(葛峴)·하리(下里)·막계(莫溪)·내점(內店)·외점(外店)·교동(校洞)·가일(加日)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 5)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일제는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동면(東面)의 주암리(注岩里)를 병합, 과천면(果川面)이라 하여 시흥군(始興郡)에 편입시켜, 관문·문원·갈현·하리·막계·주암의 6개리로 개편·관할하였다. 지금의 과천시 행정구역의 대강은 이 때 정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6) 광복(光復) 후 현재까지

광복 후로도 과천의 행정구역은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979년 4월 28일 경기도 조례 제958호에 의하여 경기도 과천지구지원사업소를 설치하였다가,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하여 경기도 과천출장소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북부(北部)와 남부(南部)의 2개 지소를 두어서 북부 지소는 6개 동리를, 남부 지소는 4개 동리를 관할하였다.【주】19)
과천은 1986년 1월 1일 시(市)로 승격하였으며. 현재 과천에는 10개의 법정동과 6개의 행정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