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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先史)·고대(古代)  지명유래(地名由來)  삼국시대 
인구의 변천과 면적  고려시대  광복 직후의 행정구역 
조선전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과천의 분리지역 
근(近)·현대(現代)  조선후기 

삼국시대
수도 서울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그 남방에 위치한 과천 지역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옛 과천군 동면 신원리(新院里)와 남면 부곡리(富谷里)·산본리(山本里) 및 상서면(上西面) 일대에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이 거주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초기의 인류는 어로·채취·수렵 등으로 이동생활을 영위한 후 차차 이동식 농경에서 정주(定住)식 농경으로 생산양식이 발전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과천 지역은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과천 지역이 문헌자료에 처음 기록된 것은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소위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 경 이후이다. 국가의 영역에 대하여 논란이 있으나 한강 이남인 과천 지역은 대개 진국(辰國)의 영역에 것 같다. 이 지역은 한(漢)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일찍부터 높은 문화수준을 유지하여 후에 이 곳을 중심으로 백제가 흥기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진국이 삼한(三韓)으로 분리되면서 과천 지역은 마한(馬韓)의 영토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백제의 건국시기와 그 시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설화에 따르면, 북부여(北扶餘)에서 남하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아들인 비류(沸流)와 그 아우인 온조(溫祚)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한산(漢山)에 이르러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10명 신하의 보필을 받으면서 국가 이름을 ‘십제(十濟)’라 칭했고, 비류는 바닷가에 정착키 위해 무리를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갔으나 그곳 땅이 습하고 소금기가 있어 되돌아와 죽자 미추홀의 백성들은 위례성에 모이게 되어 국가명을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온조왕 13년(기원전 6)에는 한강 남쪽을 돌아보고 땅이 기름지므로 백성들을 옮긴 후 이듬해에 도읍을 광주(廣州)로 옮기었다. 기원후 3세기 중엽 낙랑과 대방의 침략을 받은 한강 유역의 여러 성읍국가들은 보다 큰 연맹체를 갖추어 이에 대항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었으니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백제였다. 이리하여 3세기 말에 이르러 백제는 한강 유역 일대를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근초고왕 24년(369)에는 마한을 완전히 병합(이설도 있음)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남북으로 영토의 확장을 꾀하던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 남쪽의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 부근까지 진출하여 한강 연안의 여러 성을 공격해서 빼앗았다. 당시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은 인천 부근의 미추성(彌鄒城)과 서울 동쪽 한강 연안의 아차성 등을 포함하여 대략 58성 700촌락이었다. 광개토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長壽王)은 동왕 63년(475)에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백제의 수도 한산을 함락시켰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부득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자 경기도 전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과천시 전 지역을 비롯하여 안양시 만안구 중 안양동과 동안구 호계동 지역, 군포시 전 지역, 서울특별시 용산구 전 지역, 관악구 남현동, 동작구 동작동·흑석동·사당동·본동·노량진동, 서초구 서초동·방배동·반포동·잠원동·양재동·우면동·원지동, 신원동 등의 여러 지역을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과천 지역은 이후 반도 동남부에서 세력을 키워온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즉, 신라는 백제와 공동으로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한강 유역을 공격, 상류지역의 10개군을 점령하였고, 2년 후에는 공동작전을 전개한 백제를 축출하고 하류지역마저도 점령하였다.
이후부터 삼국이 정립되어 후고구려에 의해 지배될 때까지 과천 지역은 신라의 영토로 존속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경기도 일대를 새로운 영토로 삼아 반도의 중앙부인 서해안을 확보함으로써 남양만(南陽灣) 등에서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국제적으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무왕(文武王) 16년(676)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神文王)대에 이르러 행정구획을 정비하여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동왕 5년(685)에 설치한 9주 5소경은 중국 3대의 9주9목제(九州九牧制)에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각국의 옛땅을 각각 3분하여 옛 고구려 땅에는 한산주(漢山州: 漢州)·수약주(首若州: 朔州)·하서주(河西州: 溟州)의 3개 주를, 옛 신라와 가야의 땅에 사벌주(沙伐州: 尙州)·삽량주(챍良州: 良州)·청주(淸州: 康州)의 3개주를, 그리고 옛 백제의 땅에는 웅천주(熊川州: 熊州)·완산주(完山州: 全州)·무진주(武珍州: 武州)의 3개주를 두어 통치하였다. 그 가운데 한산주(경덕왕대에 漢州로 개칭)는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 일부, 충북의 일부, 그리고 심지어는 평남과 충남의 일부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관내에는 1소경(中原京으로 현 忠州)과 28군 49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9주 아래에 설치된 군과 현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일대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전국은 모두 117군과 293현으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한주(漢州)에 속한 것은 15군 35현이었으나 이외에 당시 삭주에 속하였던 가평군(嘉平郡: 현 加平)과 그 속현인 준수현(浚水縣: 현 가평군 현리), 삭주 하에 있던 지평현(砥平縣)이 포함되어 지금의 경기도 지역은 모두 16군과 37현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앞에서와 같이 과천의 행정지명은 고구려시대 율목군이었던 행정지명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면서 공암현(孔巖縣: 양천)·곡양현(穀壤縣: 시흥)·소성현(邵城縣: 인천) 등 3개 현의 영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공암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 일대이며, 소성현은 인천직할시 일대이고 곡양현은 광명시(玉吉洞 제외),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박달동,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중 영등포동·당산동·대림동·도림동·문래동·신길동·양평동, 관악구 중 봉천동·신림동, 구로구 중 가리봉동·시흥동·독산동·구로동·신도림동, 동작구 중 상도동 등이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율진군의 직할지는 지금의 과천시를 비롯하여 군포시·서울특별시 용산구·동작구(상도동 제외)·서초구(내곡동·도곡동 제외) 등이었으며, 이 때가 과천의 최융성기였다.
경기도지역(京畿道地域)에 포함되는 군연(郡沿) 및 현연(顯沿)
*郡沿와 州沿는 제외, ()는 現在地名
·자료:『한국地誌』지방편1.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