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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先史)·고대(古代)  지명유래(地名由來)  삼국시대 
인구의 변천과 면적  고려시대  광복 직후의 행정구역 
조선전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과천의 분리지역 
근(近)·현대(現代)  조선후기 

고려시대
신라 말기에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후삼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당시에 한산주(漢山州) 관내에 있던 율진군은 궁예(弓裔)에게 신라 효공왕 2년(898)에 평정되어 후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918년 궁예가 휘하의 부하로 있던 왕건(王建)에 의해 축출당하자 과천 지역은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에 수도를 송악(松岳: 개성)으로 옮기고 신라 하대 이래의 여러 모순을 해결하는 한편, 고려 건국에 도움을 준 지방세력인 호족들을 회유하고 복속시키는 양면 정책을 수행하였다.
고려사회가 점차 안정국면으로 들어가자 태조 23년(940)에 신라 경덕왕대 이래로 실시해온 모든 주·군·현의 행정지명을 전면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과천 지역은 율진군에서 과주군(果州郡)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시대에 지명을 바꾼곳의 특징으로는 신라시대 9주지역 외에 국가의 공헌이 있거나 왕실의 외척 등에 ‘∼州’의 명칭을 확대 사용한 것이라 하겠다. 예컨대 인주(仁州)·포주(抱州)·금주(錦州)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위의 것은 지관(知官)으로서의 주의 명칭이고, 과주군은 감무관(監務官)으로서의 명칭이으로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고려조의 지방행정제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12목제(牧制)로 개편을 보았다. 12목은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해주(海州)·황주(黃州)인데, 이는 단순히 지방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지방호족들을 감독하는 데 주 목적이 있었다. 이후 성종 14년(995)에는 종래의 행정구역을 재획정하여 지방은 10도로 나누고 각 도 밑에는 주(州)·부(府)·군(郡)·현(縣)을 설치하는 한편, 12목에는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10도제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10도란 관내도(關內道: 경기도·황해도 일대)를 비롯하여 중원도(中原道)·하남도(河南道)·강남도(江南道)·해양도(海陽道)·영남도(嶺南道)·영동도(嶺東道)·산남도(山南道)·삭방도(朔方道)·패서도(浿西道)였다.
성종대의 지방행정제도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별호제(別號制)였다. 성종 10년의 별호제는 고려의 지방제도가 확립되는 시기의 특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의 본관이나 성씨·봉작명(封爵名)의 운영에 있어서도 기본이 되는 원리였다. 더욱이 지명 이외에 따로 별호를 제정하였다는 사실에서 국가권력과 지방토호세력 간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과주군의 별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果川 本高句麗栗木郡…新羅景德王改爲栗津郡 高麗初更今名 顯宗九年來屬後置監務 別號富安(成廟所定) 又號富林 有冠嶽山 (『高麗史』 권 56, 지 10, 지리 1)
果川縣 本高句麗栗木郡 新羅改爲栗津郡 高麗改爲果州 顯宗戊午屬廣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果川縣監 別號富林(淳化所定 一作富安…) (『世宗實錄』 권 148, 지리 8)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과주의 별호는 부안(富安) 또는 부림(富林) 인데, 이러한 별호는 고려 성종 9년(990)∼13년(994)에 정해졌다고 하였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순화(淳化: 宋의 연호 990∼994) 시기에 정해졌다고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고려에서는 이 당시 성종의 유교체제 확립과 중국제도의 수용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이 송의 문물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지방의 특성을 별호로 제정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종대에는 최승노(崔承老)의 정책의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태조 이래의 공신에 대한 우대를 강조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한 그들의 출신지에 별호를 부여하도록 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무하기 위한 정책상의 필요에서 성종대에 별호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대의 이러한 지방행정제도는 그후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현종 초에 대략 완비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고려의 5도양계(五道兩界)제도이다. 이 제도는 전국을 경기와 5도(楊廣道·慶尙道·全羅道·交州道·西海道) 및 동계·북계의 양계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개경(開京: 개성)·서경(西京: 평양)·동경(東京: 경주)·남경(南京: 4양주) 등 4경과 안남(安南: 전주)·안서(安西: 해주)·안북(安北: 안주)·안동(安東) 등 4도호부, 그리고 광주·충주·청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등 8목을, 그리고 그 밑에 부·군·현을 두었다.
이와 같은 고려의 5도양계제는 우리나라 지방행정구역 변천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이 때의 과주를 비롯한 오늘날의 경기지역의 지방행정체제는 다음과 같다.

<京畿地域>
① 王京: 開城府(治域內)
② 開城縣(治地外) 貞州縣·德樹縣
③ 長湍縣·臨江縣·臨津縣·松林縣·麻田縣·積城縣·坡平縣
<楊廣道>
① 南京留守(楊州, 현 서울)
·直屬
交河郡·見州郡·抱州郡·幸州縣·峯城縣·深岳縣·豊壤縣·沙川縣·高峯縣
·安南都護府(富平)
衿州縣·童城縣·通津縣·孔岩縣·金浦縣·守安縣
·仁州郡(仁川)
唐城郡·載陽縣
·水州郡(水原)
安山縣·永新縣·雙阜縣·龍城縣·貞松縣·振威縣·陽城縣
·江華縣
鎭江縣·河陰縣·喬桐縣
② 廣州牧
·直屬
川寧郡·利川郡·竹州郡·果州郡·砥平縣·楊根縣·龍駒縣
③ 忠州牧 直屬의 陰竹縣 및 同原州郡의 黃驪縣
④ 淸州牧 天安府의 平澤縣·安城縣
<交州道>
·直屬 春川郡의 嘉平郡, 朝宗縣
·東州郡의 朔寧縣·캕州縣·僧嶺縣·洞陰縣(以上 2京 1府 1牧 1都護府 11郡 46縣)

과주의 경우는 현종 9년(1018) 광주목에 속해 있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그 후 숙종(肅宗) 7년(1102)에 용산처(龍山處: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일대)에 벼슬 높은 관리를 시켜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 후, 충렬왕 10년(1284)에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되어 과주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조의 지방행정제도 중 특기할 사항은 경기(京畿)라고 하는 특별한 행정구역을 설치한 것이다. 즉 성종 2년에 개성부와 동시에 적현(赤縣: 京縣)과 기현(畿縣)을 파하고 현을 두어 정주(貞州: 豊德郡지방)·덕수(德水: 開豊郡지방)·강음(江陰: 金川郡지방)의 개성현을 두어 장단현령으로 하여금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의 7현을 관할케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켜 ‘경기(京畿)’라 칭하였다. 그 후 문종 23년(1069)에 다시 50군현으로 확장한 후,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조준(趙浚: 1346∼1405)이 사전(私田)개혁에 관한 소를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림에 따라, 사전개혁이 실시되어 경기를 좌우로 분정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우도에는 과주를 비롯하여 금주현·안산군 등이 속했고, 경기좌도에는 개성현·강음현·김포현 등이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