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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先史)·고대(古代)  지명유래(地名由來)  삼국시대 
인구의 변천과 면적  고려시대  광복 직후의 행정구역 
조선전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과천의 분리지역 
근(近)·현대(現代)  조선후기 

조선전기
이성계(李成桂)는 조선을 건국하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어 정치제도가 완비되어가자 태종 2년(1402)에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합하여 ‘경기좌우도’라 칭하였다. 이후 태종 13년(1413)에 전면적인 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8도제의 실시였다. 8도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함경도·평안도인데, 이후 고종 32년(1895) 23부제로 개칭될 때까지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8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부윤(府尹)·목사(牧使)·부사(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 등을 통할·감시하였다. 한편, 태종 13년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는 1목·8도호부·6군·26현으로 편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牧: 廣州牧(1)
·都護府: 楊州·水原·南陽·富平·江華·鐵原·驪興·原平(8)
·郡: 安山·仁川·安城·楊根·海豊·朔寧(6)
·縣: 陽智·通津·喬桐·陽川·金浦·漣川·麻田·臨江·安峽·長湍·永平·陽城·振威·加平·抱川·積城·臨津·交河·高陽·衿川·川寧·利川·果川·龍仁·陰竹·砥平(26)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과주는 과천현으로 개칭됨과 아울러 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조의 성립과 함께 전개된 태종 13년의 지명변개의 특징은 고려시대에 남발되었던 「-州」의 명칭을 대폭 정리한 것인데, 이는 다분히 고려왕조의 잔재를 불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 권 148, 지리 8, 과천현조에 과천현의 연혁을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무릇 州와 府와 郡과 縣의 사이에는 각각 등급이 있는데,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본따서 知官이 행정관이 있는 자리에도 州자도 붙여 부르는데, 이런 보기로는 인주(仁州)니 괴주(槐州)니 하는 따위가 바로 이것이고, 현감(縣監)으로서 州자를 붙여 부르는 고을은 과주(果州)와 금주(衿州)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뒤섞여 부르기 때문에 그 고을의 등급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많아 지관(知官)이나 감무관(監務官)으로 행정관리가 된 고을은 그 州자를 모두 -山자나 -川자로 바꾸었다. 뒤에 나오는 -山이니 -川이니 하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어

라고 하여, 과주(果州)가 과천(果川)으로 개칭된 것이다.
태종 13년에 개칭된 과천현은 이듬해 다시 금천현(衿川縣)과 병합하여 금천현의 ‘衿’자와 과천현의 ‘果’자를 합해 ‘금과현(衿果縣)’이라 칭하였으나, 불과 두어 달 만에 파하고 예전대로 복구하였다. 이어 다시 세조 2년(1456)에 금천현과 병합했지만, 역시 얼마 안 가 파하고 예전의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사실을 『태종실록』 태종 14년 8월 신유 및 동 9월 무인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 21일 신유(辛酉)에 왕이 의정부·육조·대간들을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인견(引見)하여 경외(京外)의 용관(冗官)을 도태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이 명령에 따라 신하들이 자문(紫門)에 모여 의논한 결과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을 합하여 용인(龍仁)으로 하고 금천·과천을 합하여 금과(衿果)로 하며, 교하(交河)를 원평(原平)에 붙이고 김포·양천을 합하여 금양(金陽)으로….

곧 여러 고을의 군현 합병안을 제시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고, 다음달인 9월 8일 무인에 금천과 과천을 합하여 ‘금과(衿果)’로 정함으로써 현청 소재지를 금천으로 하였다. 이와 아울러 김포와 양천을 합하여 김포에 현치(縣治)를 두었다. 그런데 과천과 양천이 각각 경성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라는 이유로 군현의 통폐합을 재고함이 어떠냐는 것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과천을 금천으로 옮기고 양천을 김포에 옮기는 것이 좋다”는 호조의 의견이 있어 원안대로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무리가 따랐던지 다음달인 윤9월 24일 호조에서 “지난번에 과천을 금천에 병합했으나 경성에서 수원까지의 사객영송(使客迎送) 등에 불편하니 과천현감을 다시 두기로 하고 그 대신 금천을 양천에 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하고 김포는 부평에 붙일 것을” 아뢰어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상과 같은 군현의 병합 역시 무리가 있었던지 태종 16년(1416) 8월 30일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앞서 병합한 군현 중 금천과 양천, 삭녕과 안협, 마전과 연천, 김포 등을 종전대로 복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 개편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어 세조 2년(1456) 5월 승정원에서 “과천과 금천을 병합하여 한 고을로 만들어 금천을 치소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으나 전지(傳旨)하기를 “이조(吏曹)에서 병조판서 신숙주와 함께 의논하여 다시 아뢰라”고 하였고, 이듬해(1457) 2월 25일 이조에서 경기관찰사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처음에 과천과 금천을 합쳐서 한 고을로 삼고는 금천으로서 치소(治所)를 삼았으니 비록 양재역과는 거리가 조금 멀지마는 대소사객(大所使客)들을 역에서 스스로 접대하게 되니 읍과 다름이 없습니다. 청하옵건대 금천으로써 치소를 삼게 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세조 6년(1462) 5월 3일 이조에서 과천백성들이 상언(上言)한 것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과천현을 혁파하여 금천현에 붙였으나 다만 과천현과 금천현의 거리가 30여 리이고, 또 길 옆에 있어서 사객(使客)이 더욱 번잡하게 왕래하며 인물은 지나치게 적어서 양현(兩縣)에 분주하게 왕래하면서 접대하기 어려우므로 청컨대 치소를 본현으로 옮겨 주소서”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리하여 태종조 이래 근 50여 년간 금천현과의 병합문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제도가 태종 13년에 그 체계가 확립되었다면, 군사제도는 세조대에 완비를 보게 되었다. 즉 세조 원년(1455)에 지방방위 조직을 바꾸어 내지나 주·현도 모두 재편하였는데, 경기도의 경우 수 개의 거진(巨鎭)을 두었다. 이외에 광주·양주·부평의 3도(道)로 나누어 각 도마다 인근의 각 읍을 중·좌·우익으로 분속시키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모두 군사직을 겸대시켜 중익수령(中翼守令)을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로 칭하였으며, 과천현의 경우는 수원·남양·안산과 함께 부평도 좌익에 편제하였다. 그 후 세조 12년에 진관체제가 생기면서 과천현은 광주진관체제에 예속되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또 하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바로 경역(境域)에 관한 사항이다. 경역이란 보통 그 지방의 사방경계를 말하는데, 치소(治所)에서 그 지방과 경계가 되는 사방의 괴수를 표시하였다. 조선시대 과천의 치소는 읍내리(邑內里: 官門里)였다. 이 읍내리를 기점으로 한 과천현의 4경의 거리를 『세종실록』 권148, 지리8, 과천현조에서 살펴보면, 동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11리,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기 10리, 남쪽으로 광주의 지경 지석(支石)에 이르기 19리, 북쪽으로 한강(漢江)에 이르기 24리였다.
이를 다시 오늘날의 행정구역별로 비교해 보면,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에서 과천으로 진입하는 주암동과 서울특별시 강남구 포이동 간이 될 듯 하고, 서쪽으로는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과 안양 2동의 동계간이며, 남쪽으로는 군포시 부곡동과 화성군 반월면 도마교리 경계간이다. 또 북쪽으로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으로 추정된다.
그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과천현조에는 과천현의 동쪽은 광주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수원부까지 34리, 서쪽으로 금천현 경계까지 20리, 안산군 경계까지 28리, 북쪽으로 노량까지 20리이고, 서울까지는 33리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보다는 상당히 세밀한 편이나 동쪽 및 북쪽 경계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남쪽은 당시 수원부와 광주 간의 경계인 지금의 지지대까지를 경계로 하였고, 또 서쪽으로는 지금의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과 시흥시 목감동(더푼물)의 시계까지를 과천현의 경계로 기술했는데, 이는 오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자는 광주목과의 경계이고, 후자는 금천현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 이후 숙종 25년(1699)에 발간된 『과천현신수읍지(果川縣新修邑志)』와 광무 3년(1899)에 발간된 『과천군읍지』 등 여타 읍지의 과천현의 사방경계는 앞서의 자료와 큰 차이가 없어 그 내용을 생략한다.
조선시대 과천현의 지방행정에 대한 명칭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부터이다. 즉, 『동국여지승람』의 속성(續成)을 목적으로 전국의 각 읍에서 편집 상송(上送)한 읍지를 종합 편집하여 영조 35년(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과천현 방리(坊里)조에 비로소 과천현의 면명(面名)이 상술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果川縣: 7개 면>
·縣內面: 각 5리에 있다.
·東面: 동으로 20리에 있다.
·上西面: 서로 15리에 있다.
·下西面: 서로 25리에 있다.
·南面: 남으로 30리에 있다.
·上北面: 북으로 25리에 있다.
·下北面: 북으로 28리에 있다.

과천현의 행정체제는 7개 면으로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편제는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현내면은 과천현의 치소가 있는 지역을 말해주고 있는데 1895년 과천군으로 승격되면서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되었다.
현내면은 대체로 오늘날의 과천시의 행정지명으로 볼 때 과천동·중앙동·부림동·갈현동·문원동 지역 대부분이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면은 과천시의 주암동과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지역이며, 상서면은 안양시 동안구 지역, 하서면은 안양시 만안구 지역(석수동·박달동 제외), 남면은 군포시 지역, 상북면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및 서초구의 일부 지역, 하북면은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일부 지역에 각각 해당된다.
과천현의 최말단 행정지명인 리의 명칭이 기록상으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정조대이다. 즉 『여지도서』 이후 30년만인 정조 13년(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摠數)』에 처음으로 과천현의 면별 리명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果川縣;7개 면·40개 리>
·縣內面(5개 리)
邑內里: 후에 官門里로 개칭되었으며, 현 과천시 관문동·중앙동 일부 지역
文原里: 현 과천시 문원동·중앙동·별양동 지역
莫溪里: 현 과천시 막계동으로, 옛 문헌에 따라 莫界里·麥溪里 등으로 표기된다.
葛峴里: 현 과천시 갈현동지역
嘉逸里: 현 과천시 갈현동 가일마을로 옛 문헌에 따라 佳日·佳一, 加日·加一·假逸·眞逸 등으로 표기된다.

·東面(6개 리)
?巖里: 현 과천시 주암동지역
牛眠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지역
新院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지역
良材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지역, 이후 良才로 개칭
明達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지역
盤草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 )지역

·南面(7개 리)
衿井里: 현 군포시 금정동지역
堂里: 현 군포시 당동지역
鳳城里: 현 군포시 당정동지역
堂井里: 현 군포시 당정동지역
章干里: 현 군포시 부곡동지역
山底里: 현 군포시 산본동지역으로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개칭됨
富谷里: 현 군포시 부곡동지역

·上北面(6개 리)
方背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지역
浦村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지역
銅雀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지역
盤浦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지역
沙坪里: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지역
社堂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舍堂洞 및 관악구 남현동지역

·下北面(7개 리)
黑石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지역
露梁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지역
上加次山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지역
下加次山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지역
瓮幕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지역
高寺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지역

·上西面(3개 리)
三峴一里: 현 안양시 동안구지역
三峴二里: 현 안양시 동안구지역
飛山里: 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지역

·下西面(6개 리)
貴仁一洞: 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지역
貴仁二洞: 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지역
虎溪里: 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지역
安陽里: 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지역으로, 문헌에 따라 安養里·安陽里로 표기됨
後頭尾里: 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3동지역
道陽里: 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지역

한편, 과천현의 행정지명인 리의 명칭이 완비되기는 고종조라고 여겨진다. 당시의 명칭이 대체로 그대로 승격되었는데, 다음 자료는 고종 8년(1871)에 발간된 『과천현읍지』에 기술된 과천현의 행정구역 내용이다.

·縣內面(6개 리): 加日里·葛峴里·莫界里·文原里·下里·邑內里
·東面(6개 리): 注岩里·牛眠里·新院里·良才里·明達里·霜草里
·南面(7개 리): 衿井里·堂里·堂井里·鳳城里·章干里·山本里·富谷里
·上北面(6개 리): 舍堂里·方背里·浦村里·銅雀里·盤浦里·沙坪里
·下北面(8개 리): 黑石里·鷺梁里·上加次山里·下加次山里·新分村里·高寺里·瓮店里·瓮幕里
·上西面(3개 리): 一洞里·二洞里·飛山里
·下西面(8개 리): 一洞里·二洞里·道陽里·虎溪里·安養里·撥舍里·後頭尾里·石手村

동과 리는 모두 44개로 앞서 『호구총수』보다 4개가 많다. 아울러 명칭에 있어서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내면의 경우 ‘嘉逸里’가 ‘加日里’로, ‘莫溪里’가 ‘莫界里’로 개칭되었고, 하리(下里: 현 과천시 과천동)가 새로 추가되었다. 동면은 ‘?巖里’가 ‘注岩里’로, ‘良材里’가 ‘良才里’로, ‘盤草里’가 ‘霜草里’로 바뀌었다. 남면은 ‘山底里’가 ‘山本里’로, 상북면은 ‘社堂里’가 ‘舍堂里’로, ‘露梁里’가 ‘鷺梁里’로 바뀌었고, ‘新村分里’가 새로 추가되었다. 이와 아울러 상서면은 ‘三峴一里’가 ‘一洞里’로, ‘三峴二里’가 ‘二洞里’로 각각 개칭되었고, 하서면은 6개 리에서 8개 리로 2개 리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명칭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즉 귀인1동과 귀인2동은 ‘一洞里’·‘二洞里’로 되었고, ‘撥舍里’(현 안양역전 부근으로 추정)와 ‘石手村’(현 안양 2동으로 안양유원지 부근에 있는 마을)이 추가되었다.
조선시대 과천지방의 행정구역은 세조 이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열강의 침입으로 인한 문호개방으로 인해 지방행정제도의 일대 개편을 보게 되었다. 곧 1895년 1월 7일 일제의 조종에 의해 제정된 ‘홍범(洪範) 14조’가 선포되었는데, 그 14조 중에는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주】44)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동년 5월 26일 전문 6조의 칙령 제98호인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지방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지방행정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천현이 과천군(果川郡)으로 승격되었다.
23부는 한성부(漢城府)를 비롯한 인천부(仁川府)·충주부(忠州府)·공주부(公州府)·개성부(開城府) 등인데, 과천군의 경우 인천군·김포군·부평군·양천군·안산군·시흥군·수원군·남양군·통진군·강화군·교동군(뒤에 강화군에 병합) 등과 함께 인천부(치소, 인천 제물포)에 속하였다. 이어 동년 9월 5일에는 칙령 제164호인 ‘군수관등봉급(郡守官等俸給)에 관한 건’에 따라 과천은 5등군으로 정하여졌으며, 당시 군수의 연간 봉급액은 600원이었다.
그러나 23부제도 불합리한 점이 많아 시행한 지 불과 1년 2개월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듬해 8월 4일 칙령 제36호인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 개정의 건’을 공포하여 13도제가 시행되었다. 13도제는 종래의 8도제를 바탕으로 하여 경기·강원·황해를 제외한 5도를 남북 양개도로 분할한 것이다. 오늘날의 지방행정구역 체계는 바로 이 13도제에서부터 그 기반이 확립되었다. 한편, 13도제에 따른 경기도의 개편내용은 다음과 같다.

·京畿道(4府 治所: 水原)
一等: 廣州府·開城府·江華府·仁川府
二等: 水原郡
三等: 驪州郡·楊州郡·長湍郡·通津郡
四等: 果川郡·安山郡·始興郡·坡州郡·利川郡·富平郡·南陽郡·豊德郡·抱川郡·竹山郡·楊根郡·朔寧郡·安城郡·高陽郡·金浦郡·永平郡·麻田郡·交河郡·加平郡·龍仁郡·陰竹郡·振威郡·陽川郡·砥平郡·漣川郡·陽智郡·陽城郡·喬桐郡·積城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