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자료박물관> 과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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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사위(士威)의 아들이고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유경(有慶)의 손자이다.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과천에 우거(寓居)하였다. 묘가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판서 조(肇)의 아들이다. 문종 2년(1452)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을 거쳐 공조좌랑·이조참의·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를 두루 역임하였다. 묘가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에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南四面) 완장리(完庄里)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효자, 문신으로 죽산(竹山)에서 태어났다. 문종 1년(145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이 되고 이듬해 교수(敎授)에 승진하였다. 단종 1년(1453) 모친상을 당함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또한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병이 들어 기거가 불편하자 수년 동안 갖은 시중을 드는 등 효행(孝行)이 지극하였다. 단종 3년(1455)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그 자손은 음서(蔭敍)로 등용되었다. 묘가 과천현 갈현리(현 갈현동 수자원공사 뒷편)에 있다.
종실(宗室)로 조선 태종의 제8남으로 신녕궁주(信寧宮主) 영월 신씨(寧越辛氏)의 소생이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여러 고명(顧命)대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 했을 때, 이에 가담치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가 통곡하고 14일 동안을 단식하면서 혹시 죽더라도 나라에서 주는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시호는 희의(僖懿)이고, 묘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다.
종실(宗室)로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아들로 품계가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안(僖安)이고 묘는 청계산 기슭인 막계동내 광명동(廣明洞)에 있었으나 1978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해 안성군 양성면(陽城面)에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첤)이며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직산(稷山)현감을 지낸 속(束)의 아들로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의 증손이다. 세종 29년(144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된 후 감찰과 주서(注書)를 거쳐 단종 원년(1453)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궁궐내에서 회음(會飮)한 죄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세조 원년(1455) 교리(校理)로 발탁되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훈되고, 이후 사간(司諫)을 거쳐 세조 6년 예조정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郞廳)을 겸직하였다가 이어 사인(舍人)이 되었다. 세조 10년 한성판윤(漢城判尹)·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익년 진주(晋州)에 있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모친병환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세조 12년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와 변정원(辨定院: 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종 3년(1472) 병조참판에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성종 6년 형조판서로 내직으로 들어온 후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나, 성종 10년 윤씨(尹氏) 폐비(廢妃)에 반대, 사직하였다. 성종 18년(1487)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성종 20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아들 숙서(叔콒)를 사재감 정(司宰監正)에 임명하면서 상피(相避)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어 호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을 거쳐 경상도순변사(慶尙道巡邊使)가 되어 각 지방의 방어상태를 순시하고 성종 23년(1492) 우찬성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년(1494) 공조판서로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하여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가 되고 연산군 2년(1496) 우의정에 올라 궤장(?杖)을 하사받았으나 탐학한 재상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임되었다. 시호는 양경(良敬)이고, 묘는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개국공신 도전(道傳)은 고조이며, 직산(稷山) 현감를 지낸 속(束)은 조부이다. 우의정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된 문형(文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동래(東萊) 정씨 정랑(正郞) 길흥(吉興)의 딸이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후에 공조좌랑, 수원(水原)판관을 역임하였다. 왕의 명을 받들어 충청도의 서천포(舒川浦)에 가서 수령과 만호(萬戶)들의 불법을 적발하였으며, 내직으로 돌아와 도감낭청(都監郞廳)이 되었는데, 춘궁(春宮: 세자궁)을 수리할 때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인해 벼슬이 뛰어 제용감(濟用監) 정(正)에 제수되었고, 사재감(司宰監) 정으로 전직되었다.
사재감 정으로 있을 때 아버지인 문형이 이조판서로 있었기에 상피(相避)에 해당되어 어쩔 수 없이 관직을 낮추어 부정(副正)이 되었다.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로 충청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었고, 돌아와 장예원 판결사(判決事)를 제수받았다. 공조참의·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관찰사 시절 부친의 나이가 높아서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이 병으로 들어눕게 되자 돌아와 공조참판을 제수받았다. 이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직을 옮겨 형조·호조 참판을 지냈다. 제용감 제조(提調)·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묘는 과천현 별왕리(別旺里: 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 (全州)이다. 족보에 의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아버지는 반남도정(潘南都正) 예(禮)로 천읍군(川邑君)이 되었다. 부인은 한양(漢陽) 조(趙)씨 봉사(奉事) 치중(致中)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雨晩洞: 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청반(淸班),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관찰사 선민(善敏)의 아들로 성종 4년(1473) 충청도 도사를 거쳐 성종 12년 경차관이 되어 평안·황해도를 살폈다. 성종 14년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을 역임하고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으로 영안도(永安道)를 순시하였다. 이듬해 안성군수(安城郡守)를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 산 77-1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선민(善敏)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때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지냈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선민(善敏)의 셋째 아들이다. 통훈대부로 함종현령(咸從縣令)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라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를 거쳐 성종 24년(1493) 함경도 이산군수(理山郡守)를 역임하였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옥순(玉筍)의 아들이다. 청도군수(淸道郡守)를 역임하였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전남 신안군 지도면(智島面)으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옥호(玉浩)의 아들이며, 관찰사 선민(善敏)의 손자이다. 통정대부로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옥호(玉浩)의 아들이며, 관찰사 선민(善敏)의 손자이다. 통정대부로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숙강(叔强)·혹은 태보(殆甫)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세조대의 우의정 람(擥)의 아들로 근(近)의 증손이다. 성종 3년(1472) 진사가 되고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을 거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발영시(拔英試)에 뽑혔다. 이듬해 감찰(監察)이 된 후 교리·응교·전한(典翰)·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는데, 성종 10년 응교로 있을 때에는 「시폐책(時弊策)」이란 제목으로 홍문관 관원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에서 1등하여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성종 12년 부제학이 되고 주문사(奏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성종 15년 도승지를 지냈다. 이어 17년 예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한성부 좌윤·호조참판을 역임한 후, 연산군 4년(1498) 동지사(冬至使)로 재차 명에 다녀와 실록청 당상관(實錄廳堂上官)으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을 주관했으나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연산군 6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어 성현(成俔) 등과 함께 『역대명감(歷代明鑑)』·『삼조보감(三朝寶鑑)』등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병을 이유로 사임하였으나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문명이 높았으며, 『동문선東文選)』에 시문(詩文)이 10여 편 전하는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때에는 존경각(尊經閣)과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유학 발전에 힘쓰기도 하였다. 저서에 『권충민공집(權忠敏公集)』이 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해 이천(利川)으로 이장하였다.
성종(成宗)의 부마(駙馬)로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성종의 제6녀인 정순옹주(靜順翁主)의 남편이다.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후손으로 주부(主簿) 현(鉉)의 아들이고 봉성위(奉城尉)에 봉해졌다. 묘가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 한천동(寒泉洞)에 있고, 여주군 대신면(大新面) 보통리(甫通里)에 사당(祠堂)이 있다.
조선조 성종(成宗)의 제6녀로 숙의(淑儀) 홍씨(洪氏) 소생이며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의 부인이다. 묘가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 한천동(寒泉洞)에 있고, 사당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생원 빈(濱)의 아들로 광주목사(廣州牧使)인 항(沆)에게 입양하였다. 중종 39년(1544) 음서로 추천되어 가선대부에 올라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명종 9년(1554) 함경도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後)로 옮기고 1563년 인산첨사(燐山僉使)가 되었다. 묘가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 공사로 인하여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회장군 행충좌위부호군 익번(益蕃)의 아들로 벼슬은 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행통훈대부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냈다. 문예(文藝)가 뛰어났고 글씨가 남달랐으며, 진사가 되었으나 요절하여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부인은 고령(高靈) 신(申)씨로 참의 벼슬을 거친 복순(復淳)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이지(怡之),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조정랑을 지낸 장(璋)의 아들이다. 중종 38년(154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 15년(156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三司)에 들어갔다. 이어 통훈대부 행 사복시(司僕侍) 정(正) 겸 춘추관 편수관과 기주관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덕수(德水) 이씨 원정(元禎)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임(子任)이고 호는 사촌(沙村)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손으로 군수 희남(希男)의 제2남. 명종 22년(1567) 진사를 거쳐 선조 9년(1576)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선조 14년(1581)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호조좌랑·예안현감(禮安縣監)·형조와 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고, 선조 19년(1586) 함안군수(咸安郡守) 때 박충간(朴忠侃) 등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변고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선조 24년(1591)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부장(副將)이 되어 의병을 지휘하였다. 선조 27년(1594)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서울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동 29년에는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34년(1601)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동 37년 다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공조판서를 역임한 후 좌참찬을 거쳐, 광해군 3년(1611)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영의정에 추증, 시호는 안양(安襄). 묘가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이택 (而擇)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경기도관찰사 전(詮)의 아들이다. 명종 19년(1564) 진사에 올랐으나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고 선조 35년 상(喪)을 당하여 제대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가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거창(居昌)으로 사헌부 집의(執義)를 증직으로 받았다. 부인은 진주(晋州) 유씨(柳氏)로 만호(萬戶) 직을 역임한 기문(起門)의 딸로 여욱(汝郁)이란 아들을 두었다.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物業洞) 대릉곡(大陵谷: 현 과천시 과천동 남태령 우측 계곡)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지(明之)이며, 호는 죽간(竹磵)이고,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유선(惟善)의 아들로 노사신(盧思愼)의 문인(門人)이었다.
선조 12년(1579) 사마시에 올라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찰방이 되었는데, 이 무렵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흥학6조소(興學六條疏)를 올렸다. 선조 28년(1595)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고 곧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옮겼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南原)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였다. 그 후 고양군수(高陽郡守)로 복직되고,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역임한 후 형조정랑으로 있을 때 『주역(周易)』을 교정하였고,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때에 시강(侍講)한 인연으로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우부승지·전주부윤(全州府尹)·부총관(副摠管)을 두루 역임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고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좌천되었다. 그 후 다시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제수되었으나 이 때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부평군수(富平郡守)·성주목사(星州牧使) 등을 지내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재행(才行)을 겸비하고 학술이 정심(精深)한 것으로 천거되었으며,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받은 일도 있었다. 저서에 『죽간집(竹磵集)』이 있다. 묘가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인물로 자는 화묘(和甫)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는 부사를 지낸 계은(季恩), 조부는 선무랑(宣務郞)을 역임한 인효(仁孝)이며, 참봉 홍윤(洪胤)의 아들이다. 문화(文化) 유씨 첨정(僉正) 오(塢)의 딸이 그의 어머니이다. 어려서 성품이 강하고 밝으며 기골(氣骨)이 장대함과 아울러 효성이 지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병영(兵營)에 들어가 싸움에 물러서지 않았으며, 5월 14일 전투에서 숨졌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창원(昌原) 황씨 군수(郡守) 치온(致溫)의 딸이며, 3남 1녀를두었다. 묘는 과천현 갈현리 가일(加日)마을(현 과천시 갈현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난우(蘭췗)·귤실(?室)·청묘거사(淸妙居士(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송도(松都)출신이다. 식(軾)의 아들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선조 10년(1577) 알성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가 되고, 선조 16년(1583) 다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선조 19년(1586) 정자로 재임시에 동향 후배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하게 한 사실이 뒤에 밝혀져 명천(明川)에 유배되었으나, 선조 21년(1588) 그의 문재(文才)를 애석히 여겨 죄가 용서되었고,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수행, 일본에 다녀왔다. 이어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선조 34년(1601) 교리가 되어 교정청의 관직을 겸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냈다.
이후 익산(益山) 웅포에 은거,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강촌별곡(江村別曲)」과 「강호별곡(江湖別曲)」을 남겼으며, 아버지 식(軾)·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문명을 날렸다. 뛰어난 문재를 타고 나서 임진왜란 때 원병 요청 등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특히 한시에 뛰어나 한호(韓濩)의 글씨·최립(崔쬬)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가사에도 조예가 깊어 이 방면의 작품을 남겼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정조 16년(1792)에 발간된 『오산집(五山集)』과 『오산설림(五山說林)』이 있다. 묘는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문원동)에 있으며, 과천에 문학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화백(華伯),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증 사헌부 집의 사룡(士龍)의 아들로 충의위(忠義衛)에 들어갔다가 승정원 좌승지를 증직으로 받았다. 부인은 함열(咸悅) 남궁씨 미(楣)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입지(立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인효(仁孝), 조부는 참봉 벼슬을 역임한 홍윤(洪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의 전투에서 숨진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흡(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군수(郡守) 벼슬을 거친 창원(昌原) 황씨 치온(致溫)의 딸이다. 광해군 당시 부(賦)를 지음에 왕에게 미움을 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음 해 사마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교관(敎官)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전의(全義) 이씨 대린(大麟)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다. 묘는 과천현 갈현리 가일(加日) 문례동(問禮洞: 현 과천시 갈현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부는 참봉 홍윤(洪胤)이고,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흡(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흡의 동생인 회(會)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는 군수(郡守)를 지낸 창원(昌原) 황씨 치온(致溫)의 딸이다. 선조 36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부인은 전주(全州) 이씨 정자(正字)를 지낸 춘상(春常)의 딸이다. 과천현 갈현리 가일(加日( 문례동(현 과천시 갈현동)에 부인과 같이 합장한 묘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지(明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부는 참봉을 지낸 홍윤(洪胤)이고, 아버지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흡(翕)이며, 교관(敎官)을 지낸 복립(復立)은 그의 형이다. 어머니는 군수(郡守)를 지낸 창원(昌原) 황씨 치온(致溫)의 딸이다. 장연현감을 지냈다. 부인은 찰방(察訪)을 지낸 전주(全州) 이씨 몽길(夢吉)의 딸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묘는 과천현 갈현리 가일(加日) 문례동(問禮洞: 현 과천시 갈현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호여(?汝)이고, 본관은 과천(果川)으로 응운(應耘)의 아들이다. 인조 11년(1633)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군수를 역임하였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용회(用晦)이며, 호는 청계거사(淸溪居士)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조부(祖父)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남행(南行)할 때 선전관으로 호종하였던 원우(元祐)이며, 부(父)는 행 어회장군 오위도총부 경력(行禦侮將軍五衛都摠府經歷)으로 선무(宣武)공신에 오른 경은(慶殷)이다. 모(母)는 남원(南原) 김씨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급(汲)의 딸이다. & lsquo;청계& rsquo;라는 호는, 모친인 남원 김씨의 묘가 과천의 청계산 북원(北原)에 있었는데, 박이명이 이 곳에 은거하고 있을 때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인조 22년(1644)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5년 후인 인조 27년에는 무신 중에서 근무성적이 뛰어나 서열을 뛰어넘어 서용되기도 하였다. 선전관을 거쳐 거창·보성·장단·강계·길주·회령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효종 8년(1657)에 충청수사가 되었다. 그의 환로(宦路)는 당시 붕당정치의 정국에 의해 부침이 잦았는데, 그는 서인이었던 김수흥(金壽興)·김석주(金錫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현종 3년(1662)에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며, 5년에는 충청수사, 현종 9년에는 경상좌수사가 되었고, 10년에 전라병사를 역임하였다. 현종 11년에는 통제사인 유비연(柳斐然)의 옥사에 연좌되어 일시 파직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당시 조정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켜, 같은 서인인 김석주와 송준길(宋浚吉)이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서용되어 훈련도정(訓鍊都正)·금군별장(禁軍別將)·영중군(御營中軍) 등을 역임하여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부인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울산 이씨 경묵(慶墨)의 딸이며, 아들로는 음사로 통덕랑을 지낸 정석(廷碩)을 두었다. 숙종 2년(1676)에 서거하였으며, 묘는 울산군 온양면 남창리의 선산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중(永仲),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윤정(尹禎)의 아들이다. 과천에 생거(生居)하던 중 숙종 원년(1675)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을 역임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고(仲高), 본관은 진주(晋州)로, 제(堤)의 아들이다. 과천에 생거(生居)하던 중 숙종 5년(1678)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교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백겸(伯謙),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증 호조참판 회장(晦章)의 아들로 숙종 1년(1675)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화를 만나 취소되었다. 숙종 17년 금도릉(禁都陵) 령, 호랑(戶郞) 등을 역임하고 양구(楊口)현감에 이르렀다. 1719년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연일(延日) 정(鄭)씨 복(復)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동야(東野)이고 본관은 과천(果川)으로 전명록(田命祿)의 아들이다. 숙종 21년(1695)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계장(季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훈련대장을 지낸 만기(萬基(의 딸인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외숙부이다. 생원시에 오른 후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당시 부사용(副司勇)으로 공을 세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숙종 13년(1687) 형조좌랑을 거쳐 순창(順昌) 군수에 이르렀다.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해 1977년 현 시흥시 과림동으로 옮겼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과천(果川)이며, 양지(養志)의 아들이다. 숙종 13년(1683)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자는 여원(汝元)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항(沆)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참판 의금부사(義禁府使)를 역임한 상호(商?)이다. 어머니는 전주(全州) 이씨로 원필(元弼)의 딸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춘추관성균관 사의(事儀) 금부사(禁府事)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받았다. 아들 중에 기(騏)는 충·효군자로 칭송을 받은 효자이며, 부인은 둘을 두었는데, 첫 부인은 첨사(僉使)를 지낸 파평(坡平) 윤씨 상언(商彦)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전주 이씨로 첨지(僉知) 의익(誼益)의 딸이다.
묘는 처음 양주군 판동(板洞)에 있었으나 이씨 부인의 사후(死後) 과천의 광창(廣倉: 현 과천경마장 근처의 과천동)에 옮겨 왔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옥(中玉)이고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성균진사 주하(柱夏)의 아들아이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세손으로 인천 소암촌(疏岩村)에서 출생하였다. 숙종 3년(1677) 사마시를 거쳐 동 6년(168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 숙종 8년 율봉도(栗峰道) 찰방으로 나갔다가 동 10년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고, 이듬해 정자를 거쳐 저작(著作)·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예겸하였다. 숙종 12년(1686) 금산(錦山)군수로 부임, 덕유산 도적을 토평하고, 이어 광주부 경력(光州府經歷)을 거쳐 이듬해 성주목사가 되어 독용산성(禿用山城)을 수축하였다. 숙종 16년(1690) 청주목사에 도임하고, 곧 이어 동래부사로 옮겼다가 다시 양주목사가 되어 한 임기를 더 잉임(仍任)하였으나 숙종 19년 전정(前政)이 소루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숙종 20년부터 한 때 강화도에 우거하면서 『강도지(江都誌)』 2권을 수어책(守禦策)을 갖추어 저술하였다. 숙종 25년(1699)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도백과 뜻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영천(永川)에 복거(卜居)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은거하려 했으나 29년(1703)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동안 3읍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한편 덕망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敎學)을 담당케 하고 고·양·부(高梁夫)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 미풍양속을 장려하여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후 약 30년 간 퇴관하고 호연정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 『둔서록(遯筮錄)』이라는 팔외십악(八畏十惡)의 만언소(萬言疏)를 초안하였다.
영조 4년(1728) 가선대부가 되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가 되었으나 이인좌와 같은 소론(少論)으로서 당론을 발설했다는 이유로 한 때 투옥되었다. 그러나 무고임이 드러나 곧 석방되고,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정조 20년(1796)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효령대군의 사당인 청권사(淸權祠: 현 서초구 방배동 소재)를 세울 때 효령대군의 대군묘소도(大君墓所圖) 묘지(墓誌)·보첩발(譜牒跋) 등을 찬술하였으며, 그 후 과천현 객사(현 온온사)에서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영천 성남서원(城南書院)과 제주 영혜사(永惠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로 『병와집(甁窩集)』이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노(大老),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양구(楊口)현감을 지낸 만(滿)의 아들로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 14년(1688) 정당(政堂)으로 과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고사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부인은 원주(原州) 변씨 통덕랑을 지낸 세환(世煥)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중욱(重홸), 본관은 합천(陜川)이며 복원(復元)의 아들이다. 벼슬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고 부인은 연안(延安) 김(金)씨로 무과에 급제한 정현(鼎鉉)의 딸과 선산(善山) 김씨의 딸이 있었으며, 묘는 과천현 하리(현 과천시 과천동 뒷골)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례(仲禮(이며, 본관은 무안(務安)으로 승지(承旨)인 징(澄)의 아들이다. 과천에 생거(生居)하던 중 경종 원년(1721) 통덕랑(通德郞)으로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영조 5년(1729)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영조 13년(1737) 사헌부 장령이 되어,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고 대본(大本)을 세워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가납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눌(景訥),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창경(昌慶)의 아들이다. 과천에 생거(生居) 중 숙종 44년(1718) 통덕랑으로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헌부 장령을 거쳐 승지를 역임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이민(而敏 혹은 而民), 호는 만휴암(晩休菴)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현재의 의왕시 왕곡동(旺谷洞) 출생으로 대제학 유(?)의 4남이다. 영조 2년(1726)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그 뒤 실록청 낭관(實錄廳郞官)이 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 보완의 잘못을 논하다가 유배당했으나 이듬해 방면되었다.
영조 5년(1729)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고, 동 7년에 사간원 정언, 동 9년 홍문관 교리·헌납·수찬을 두루 역임하고, 영조 18년(1742)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영조 20년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호조판서 등을 지낸 후 이듬해 좌참찬에 올랐다. 익년 우참찬·판의금부사를 역임한 후 영조 23년(1747) 이조판서로 옮기고, 곧 이어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영조 25년(1749) 우의정이 되고, 그 뒤 좌의정에 올랐으나 영조 27년(1751) 이존중(李存中)이 유배되자 사직을 요청, 판중추부사에 체임되었다. 이듬해(1752) 약방도제조가 되었는데, 왕세손이 죽자 파직당하였다가 판중추부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한 때 아우 취로(取魯)·상로(相魯)와 더불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세도(勢道)를 부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 묘가 과천현 갈현리(葛峴里: 현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에 있다.
자는 휴언(休彦),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익상(益相)의 아들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동래(東萊) 정(鄭)씨 진사 선(璿)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 모릉리(牟陵里: 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삼(汝三), 본관은 보성(寶城)으로 선(銑)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 거주하던 중 영조 30년(175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익지(益之)이며, 본관은 삭령(朔寧)으로 경진(慶晋)의 아들이다. 과천에 생거 중 영조 42년(176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군수를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쾪)의 아들로 벼슬이 어회장군(禦侮將軍) 행 충좌위(忠佐衛) 부호군에 이르렀다. 부인은 개성(開城) 왕씨로 병사(兵使)를 역임한 종신(宗信)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우만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언(經彦)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성익(聖翊)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영조 39년(1763)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선여(善餘),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어려서 친아버지인 정걸(廷杰)의 동생 정휴(廷烋)에게 양자로 갔다. 영조 14년(1738( 현릉(顯陵)참봉을 지내고 동 16년 과천현감에 제수되었다. 이어 1744년 문과 교리(校理)·수찬·승지 등을 역임하고 영조 20년(1744)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은퇴 후 과천 향리에 우거할 때, 정조가 그의 사직을 아쉬워 하여 써 내린 시가 있으며(제영편 참조), 수원 현륭원 거둥시에 과천 객사에서 그를 불러 문답하였던 기록이 전한다. 부인은 연안(延安) 이씨 만후(萬厚)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物業洞: 현 과천시 과천동 남태령 우측 계곡)에 부인과 함께 쌍봉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영숙(永叔),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부는 증 이조판서 필리(弼履)이고, 아버지는 판관을 지내고 증 좌찬성에 오른 사석(師錫)이며, 어머니는 기계(杞溪) 유씨(兪氏) 증 참판 수기(受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특이하고 재주가 뛰어나 말이나 배울 나이에 벌써 글자를 알았다.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여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8년(1784)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자 오재순(吳載純)이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1792년 다시 선공감의 감역에 제수하였으나 역시 사임하였으며, 정조 22년(1798) 국가에서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고 인재를 등용함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천거하였으나 병을 칭하고 사임하였다. 헌종 11년(1845) 대사헌 겸 좨주(祭酒)에 증직되었고, 철종 14년(1863)에 이조판서로 가증되었으며 문헌(文獻)의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은 안동(安東) 김씨 처사(處士) 시관(時管)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하리 운만산(雲滿山: 현 과천시 과천동 우면산)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하숙(夏叔)이고 본관은 진주(晋州(, 광서(匡緖)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정조 22년(1798)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회(士晦(이며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후원(厚源)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정조 14년(1790)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진(聲振),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벼슬이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부인은 안동(安東) 권씨 옥신(玉身)의 딸이다. 묘가 과천현 하리 물업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각여(覺汝)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현조(顯祚)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정조 19년(179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가일(可一)이고 호는 유당(酉堂)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판서(判書) 이주(?柱)의 아들이고,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이다.
순조 5년(1805) 현감으로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지평을 거쳐 승지와 평안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순조 19년(1819( 예조판서와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차례로 지낸 뒤 대사헌을 거쳐 순조 27년(1827)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광주유수(廣州留守)·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순조 9년(1809)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순조 22년(1822)에는 동지사(冬至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30년(1830) 앞서 익종(翼宗)의 승명대리(承命代理) 기간에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專權)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조원(李肇源)의 옥사(獄事)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고,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순조 33년(1833) 아들 김정희의 송원(訟寃) 격쟁(擊錚)으로 일단 방송(放送)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복직되었으나 이듬해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憲宗)이 즉위, 순원왕후(順元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재차 고금도에 위배되어 헌종 6년(1840) 사사(賜死)되었다. 죽은 후 관작까지 추탈되었으나 철종 8년(1857)에 신원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신의왕후탄강구기비(神懿王后誕降舊基碑)」 등을 남겼으며, 아들 정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과천현 주암리(현 과천시 주암동)에서 살았으며, 묘도 이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화장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길(士吉)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성한(星漢)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정조 20년(1796)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묘가 의왕시 내손동에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敬涵)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종건(綜健)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감역이 되어 3개 읍의 감역을 역임하고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올라 재임하던 중 임지에서 죽었다. 묘가 과천현 갈현리(현 과천시) 찬우물(冷井)마을에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부(父) 호조참의(戶曹參議) 중석(重錫)의 둘째 아들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부인은 김해(金海) 김씨(金氏) 의찬공 통제사(義贊公統制使) 복조(複祚)의 딸이다. 묘는 과천현 갈현리 가일마을(현 과천시 갈현동 산 32번지)에 있으며, 문중에서 매년 추향제를 거행하고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우서(禹瑞)이고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학진(學鎭)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헌종 13년(1847)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문기(文基)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정한(?漢)의 아들로서 부호군(副護軍)과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묘는 과천현 갈현리 가일마을(현 과천시 갈현동 산 32번지)에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보(明甫), 본관은 거창(居昌) 이다. 고종 25년(1888) 통정대부에 올랐고, 이어 용양위 부호군(龍쵃衛副護軍(·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받았다. 부인은 언양(彦陽) 김씨 상우(相禹)의 딸이며, 묘는 과천현 하리 물업동(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임(敬臨)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상한(相漢)의 아들이다. 과천(果川)에서 생장하여 철종 5년(1854) 정시 문과에 동향인 조용하(趙用夏)와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운락(雲洛)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제(亮濟)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철종 8년(185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숙(英叔)이고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종림(鍾林)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고종 10년(1873)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원평(元平)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익조(翊朝)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고종 19년(1882)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종(聖從)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상준(商駿)의 아들이다. 과천에서 생장하여 고종 11년(1874)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고종 13년(1876) 예문관 검열이 된 뒤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고종 24년(1887) 이조참의에 오르고 이어 좌참찬이 되었다.
고종 29년(1892) 덕원부사에 재임 중 그곳에서 엄익조(嚴益祚) 등이 주도한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 때 그는 공전(公錢)을 빙자, 규정된 액수 이상의 세금을 민간에 강징함으로써 민란을 더욱 유발시켰다는 함경감사 서정순(徐正淳)의 장계에 의해 의금부에서 문책을 받고 무주(茂朱)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곧 풀려나 우승지가 되고 고종 31년(1894)에는 경연관을 역임하였다.
17세기를 전후하여 경기도 양주군에서 과천에 입향한 본관 울산(蔚山)의 후손으로서 과천군 군내면 갈현리(현 과천시 갈현동) 가루개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송계(松溪)이다.
8·15해방과 더불어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지방자치를 1953년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에 과천면의회에서 과천면장으로 당선되었고, 1956년 2차로 실시한 주민직접선거에서 재당되었고,1959년에 역시 주민직접선거에서 3선됨으로 주민으로부터 신망을 인정받았으며, 연 10년간 재임하면서 과천지역사회 발전에 여러가지 치적을 남기었다. 그 후 1979년에 시흥향교(始興鄕校)의 전교(典校)로 그리고 경기도 향교재단의 감사로 피선되어 역임하면서 지역사회 유도(儒道)정신 함양과 향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묘는 과천시 갈현리 가일마을(현 과천시 갈현동 산 32번지)에 있다.
줄타기 기능보유자. 일제강점기의 과천면 갈현리(葛峴里: 현 과천시 갈현동) 출신으로 9세 때부터 스승 김관보로부터 지팡이 짚고 줄타기·잔노릇·살판 등 전통 줄타기 기능을 전수받았다. 1976년 6월 30일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전남 장흥(長興)에서 공연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묘가 갈현동 가일마을에 있다.
집필자】 李完宰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경지(慶之)이고 호는 죽정(竹亭)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청주(淸州) 출신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낸 재(宰)의 아들이다.
공민왕 9년(1360)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인관직(宣人館直)이 되고, 1365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 전주성을 수축하였다. 1369년에는 상서공부산랑(尙書工部散郞)·판도좌랑(判圖佐郞)이 되어 농민 시폐(時弊)의 시정에 힘썼다.
그 후 전양시 승(典養寺丞)을 거쳐 공민왕 23년(1374)에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로 나갔다가, 동년 봉선대부(奉善大夫)에 올라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우왕 1년(1375) 전법총랑(典法摠郞) 이성계의 천거로 동 부원수가 된 후 사재령(司宰令)을 거쳐, 다시 전법사 지사(典法司知事)에 옮겼는데, 이듬해 송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다 권신(權臣)의 미움을 사서 삭직당하고 고향인 청주로 낙향하였다.
그 후 우왕 8년 통덕대부(通德大夫)에 올라 공주목사(公州牧使)에 복직되었다가 동 11년(1385) 다시 봉익판서(奉翊判書)에 승진, 우왕 14년 초에 양광도(楊廣道)안렴사로 나갔다. 곧 이어 서북면안렴사로 옮겼는데, 마침 요동정벌(遼東征伐)이 있게 되어 운량사(運糧使)로서 참전하였다.
조선 태조 2년 한양 신도읍의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의 책임을 맡았다. 동 4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훈되고 경상도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서울 남대문(南大門: 崇禮門) 축조의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 태조 7년(1398)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유후가 된 후 다시 경기우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가 정종 2년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하였다. 태종 1년(1401) 좌참찬으로 공조판서를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3년(1403)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옮기고, 태종 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좌참찬 겸 의정부사(議政府事)로서 치사하였다. 태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시호는 평도(平度)이며, 청주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만년에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은거했으며, 묘는 용인군 기흥읍에 있다.
고려말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천(信川),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아들이며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오빠이다. 공민왕대에 문과에 급제,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에 은거하며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였다.
태조 때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해졌고, 좌리공신(佐理功臣) 첨의정승(僉議政丞)에 녹훈(錄勳)되었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며, 묘가 과천현 문원리(현 과천시 중앙동)에 있는데, 금계포란형(金鷄抱卯形)의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초기 무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부는 개국3등공신이며 제1,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인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사(定社)·좌명(佐命) 공신에 책록된 영무(英茂)이다. 아버지는 리(理)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낸 문화(文化) 유씨 은지(殷之)의 딸이다.
벼슬이 교위중군부사직우위(校尉中軍副司直右衛)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사후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말미암아 가문이 몰락하였다. 부인은 인주(仁州) 이씨로 판서를 역임한 효례(孝禮)의 딸이며, 슬하에 1남4녀를 두었다. 묘는 과천현 하리(현 과천시 과천동)에 있는데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