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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설화 (과천향토사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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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악산은 불산

    관악산은 불산

    관악산(冠岳山)은 태고 이래로 과천시(果川市)의 변천 모습을 묵묵히 지켜온 명산(名山)이다.

    관악산(冠岳山)은 또 서울의 조산(朝山)이다. 내룡은 경상도 태백산맥으로 마이산(馬耳山)에서 갈라져 충청도 속리산으로 중조(中祖)가 되어 역으로 치달아 한강을 지계선(地界線)으로 과천 벌판에 우뚝 솟아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뾰족하다 하여 관악(冠岳)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악산은 역사적으로 풍수지리학상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쳐다보기조차 꺼려했던 산이었다.

    조선 초기에 왕궁터[宮基]를 정하는 데, 관악산을 정남(正南)으로 하면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無學)의 주장과 남면(南面)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이 양립되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아무튼 관악산이 불산(火山)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火氣)를 끊는다는 풍수설에서 서울 숭례문(崇禮門:현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 뿐만 아니라 모든 성문의 액명(額銘)이 가로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숭례문의 액명이 세로로 되어 있음도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기를 막는다는 뜻에서였다. 예(禮)는 오행(五行)으로 따져 화(火)에 해당하고, 오방(五方)으로 따져서는 남(南)에 해당한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崇禮)는 세로로 붙여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로 불산(火山)에서 옮겨 붙을 불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대원군 집정시에 경복궁을 재건할 때 관악의 화기(火氣)를 극복하기 위하여 물짐승인 해태 조각상을 궁전에 안치했다고 하며, 또 관악산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龍)을 그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했는가 하면, 관악의 주봉(主峰)인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묻은 것도 그 때문이다.

    풍수는 믿을 만한 게 못된다. 그렇지만 풍수를 믿음으로써 빚어진 구체적인 형상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실례로 서울 양반촌인 북촌(北村)에서는 이 관악산과 맞바로 보이는 집에서 자라난 딸과는 혼인을 거절한 실례가 있는가 하면, 주민들이 관악산과 마주 보이는 곳을 피한다든지, 또는 친정으로 가 아이를 낳는 풍습까지 있었는데, 이는 불의 문화적 해석으로 열정적이고 반체적이기에 요망스럽고, 음탕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할 수 없다는 풍수의 숙명 때문이었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Gwanaksan (冠 岳山) since the ancient Gwacheon (果 川 市) and quietly defended the history of his famous (名山) said.

    Gwanaksan (冠 岳山) Seoul's also premature (朝山) said. Taebaek naeryong in the Gyeongsang mayisan (? 耳 山) diverged from the Chungcheong Songnisan sodium bicarbonate (中 祖) is the station liable jigyeseon Han (地 界?) Gwacheon as Triangle Mountain rises to the field and has faced.

    The tube like shape (冠) pointed to as Brass (冠 岳) will be called yireumhan.

    Historically, the pungsujiri Gwanaksan in Foshan, south of Seoul, neurological (王 都 南方 之 火山) chyeodabogi even enjoyed the mountain was called.

    Korea initially wanggungteo (? 基) and to establish, and Jeong Nam Gwanaksan (正南) when the gungseong (?城) to overrule the state is not pyeonganchi Undecided (无 ?) claims and myeon (南面) got on the river hadaneun safely jeongdojeon (? 道 ?) is a well known fact that the claim doeeoteumeun compatible.

    Anyway, the Foshan Gwanaksan (火山) it is not likely to break. So blow the fire, acid Gwanaksan and Samseongsan (火?) is a break in pungsuseol Seoul Namdaemun (崇 propriety ?: current Namdaemun) in front of left (南 池) and dug a pond. Ponds, as well as all the gates of aekmyeong (? ?) is in the horizontal than vertical is aekmyeongyi of Namdaemun in Seoul, also a dick move mountains of injustice means to prevent firearms eseoyeotda. Yes (propriety), the five elements (五行) weigh on Fire (火) corresponds to, and Yaobang (五方) ttajyeoseo in the South (南) is equivalent to.

    Sung (崇) sungrye place for the fire burn hieroglyphics (崇 propriety), preceded by a vertical fire can burn, the fire flares up, Foshan (火山) will be able to prevent the fire from the dick move right.

    When you rebuild Daewongun jipjeong Brass firearms at Gyeongbokgung (火?) to overcome muljimseungin Haitai statue was enshrined in the palace, and the top of the Eda Gwanaksan dug wells, made of copper dragon (dragon) and the wells put Eda When did the fire suppression, wind the main peak (主峰) is yeonjubong (戀 主峰) in the nine banghwabu (防火 符) muldanjireul put anything that is stained.

    Feng Shui not seem credible. But faith in feng shui as a concrete shape biteojin can not believe.

    Excuse me, Seoul yangbanchonin Bukchon (北 村) Gwanaksan with this look at home grown matbaro marriage ttalgwaneun that you have rejected me, the people facing Gwanaksan and avoid looking at any place, or your mother gave birth to a child with I had to customs, the cultural interpretation of fire as passionate demands banchejeokyigie crazy, nasty part of the work (一夫 ?事) may not be destiny that was because of Feng Shui.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冠岳山(冠岳山)は太古以?で果川市(果川市)の移り?わり姿を??とジキョオン名山(名山)だ.

    冠岳山(冠岳山)はまたソウルの早産(朝山)だ. ??は慶?道太白山脈で馬耳山(馬耳山)で割れる忠?道俗離山で重曹(中祖)になる役で走り上げて漢江を地界船(地界線)で果川原野ににょっきと湧いて三角山と向い合うある.

    その形象が終える(冠)のように尖ったようだと言って冠岳(冠岳)と呼んだのだ.

    冠岳山は?史的に風水地理?上ソウル南側にあるフッ酸(王都南方之火山)といって眺めることさえ憚った山だ.

    朝鮮初期にワンググングト[宮基]を決めるのに, 冠岳山を正南(正南)にすれば宮城(宮城)を威?して?家が平安ではないという無?(無?)の主張と南面(南面)に漢江がある構わないという鄭道?(鄭道?)の主張が?立されたのは有名な事?だ.

    とにかく冠岳山がフッ酸(火山)であるのは違うことがないようだ. それで不意山である冠岳山と三城山の火の?(火?)を切るという風水?でソウル崇?門(崇?門:現南大門) まん前に南至(南池)という池をほった. 池だけでなくすべての成文のエックミョング(額銘)が?になるある事に比べて崇?門のエックミョングが?になるあるのもこの不意山で移す付くソウルの火器を阻むという意味であった. 例(?)は五行(五行)で計算する火(火)にあたる, 午方(五方)でタジョでは男(南)にあたる.

    スング(崇)は花火が燃える象形文字だからスングリェ(崇?)は?でブッヨは火が燃えることはできる, また燃える不老フッ酸(火山)で移す付くふえる阻むことができることで分かった.

    大院君執政の時に景福宮を再建する時冠岳の火器(火?)を?り越えるためにムルジムスングであるヘテ彫像を宮殿に安置したと言って, また冠岳山てっぺんに井を波高, あかがねで作る(?)をその井にノッオで火器を押えた上に, 冠岳の主峰(主峰)である演奏峰(?主峰)に九個の放火部(防火符)を入れたムルダンジを埋めたこともそのためだ.

    風水は信じられるのがならない. ところが風水を信?としてビッオジン具?的な形象を信じざるを得ない.

    ?例でソウル?班村である北村(北村)ではこの冠岳山とすぐ見える家で育った娘とは婚姻を?った失?があるかと言えば, 住民たちが冠岳山と向い合って見える煮こんだ避けるとか, または?家に行く子供を生む風習まであったが, これは不意文化的解?で熱情的だ反?積だから妖忘だ, 淫蕩で一夫?事(一夫?事)ができないという風水の宿命のためだった.

    (『??だ(??誌)』, 京畿道)

  • 관악산의 왕후묘

    관악산의 왕후묘

    관악산(冠岳山)은 조선시대 과천현(果川縣)의 진산(鎭山)이었다.
    이 곳 관악산(冠岳山)의 산 중턱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왕후묘(王后墓)라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의 열 번째 임금인 연산군은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즐겨 다녔다.
    하루는 임금이 내시 몇 사람을 데리고 사냥을 나섰는데, 막 산 기슭을 올라 냇물을 건너려 할 때였다. 연산군은 어찌된 일인지 내를 건널 생각은 않고 저쪽 편에 있는 빨래터만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기다리다가 지친 내시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전하, 어인 일로 내를 건너지 않으시옵니까?
    갑자기 사냥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셨도다
    일기가 화창하여 사냥하기가 더없이 좋은 날씨인데 어인 일로 사냥을 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내시는 상감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연산군은 저쪽 빨래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저기서 빨래하는 처녀가 어떻게 보이느냐? 미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박색으로 보이느냐? 어서 말해 보렷다.
    전하, 비록 촌락의 처녀이오나 천하의 절색인 줄 아뢰오역시 과인(寡人)의 눈이 틀림 없구나
    연산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돌았다. 한편, 빨래하던 처녀는 웬 사냥군 대여섯 명이 자기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아,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하던 빨래를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급히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 멀리서 그것을 본 연산군은 여봐라, 저 처녀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보고 오렷다. 과인(寡人)이 오늘밤은 호적한 촌락에서 아리따운 처녀와 더불어 회포를 풀어 보아야겠다하고, 처녀를 유심히 눈여겨 보는 것이었다.
    한편,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딸을 본 처녀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빨래를 하다 말고 이렇게 급히 뛰어오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어머니, 저기 웬 사냥군 서너 명이 제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이 때 요란히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처녀의 집 앞에서 멈추며 사냥군 차림의 장정 서너 명이 처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부인, 당신이 저 처녀의 모친 되시오?예 그러하옵니다만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나는 상감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이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며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았다.
    예? 상감마마의 …
    오늘 상감이 이 곳으로 사냥을 오셨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여기서 유숙하고 가실 것이니 방 하나 깨끗히 마련하도록 하오
    상감께서 이렇게 누추한 저의 집에 머무르시다니 … 아뭏든 상감의 영(令)이니 그대로 하도록 하시오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여인은 놀랄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아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처녀가 오늘밤 상감을 모실 것이니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하여 상감의 침소에 들여 보내도록 하시오
    제 딸을요? 어린 것이 어떻게 상감을 모시오리까? 더구나 산중에서 철없이 자란 것이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옵니다. 어린 게 실수라도 하면 …
    처녀의 어머니는 사나이들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명이오, 어서 빨리 준비되도록 서둘러야 하오정말로 하늘이 알면 노할 일이었다. 두 모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흐느끼며어머니, 만약 이 사실을 만우가 알면 날 죽이고 자기도 죽을 거예요이 처녀는 아랫 마을의 만우라는 사나이와 정혼을 했던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단장한 처녀는 연산군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누워서 처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산군은,
    이런 산골에 너 같은 천하 제일의 여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도다. 어서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하며, 처녀의 손을 잡아 끌려고 할 때 처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울긴 왜 우느냐?
    연산군은 호통을 쳤다. 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처녀는 이 말에 살며시 머리를 들며 상감께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소녀는 이미 백년가약을 약속한 자가 있는 몸이옵니다약혼자가 아니라 지아비가 있다 해도 괜찮다. 나는 만인의 어버이요, 만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거역할 수 없도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 들라. 어서
    한편, 처녀의 약혼자 만우는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미친듯이 달려와서 처녀의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앞에 지켜선 병정들이 떠밀며 막아서는 바람에 도저히 처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와 연산군이 단꿈에 취해 있는 방을 보기 위해서 그 방이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지만, 남의 아녀자를 빼앗다니 에잇, 정말로 더러운 놈의 세상이다. 국왕이면 남의 계집도 마음대로 한단 말이냐
    정말로 원통한 일이었다. 만우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장에 임금에게로 달려들고픈 심정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슬픈 상처를 안은 채 처녀와 만우는 혼인을 하였다. 연산군은 그 뒤로도 이따금씩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나왔다가는 처녀를 만나고서 환궁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일로 처녀는 남편을 마주 대할 때마다 가슴깊이 자책감을 느꼈다.
    나는 무슨 낯으로 오늘밤도 서방님을 대하나?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그리고는 뒷산 오동나무에 목을 매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바위 밑에 묻고는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연산군이 처녀의 집에 들러 그 이야기를 듣고서괘씸한 것들, 아니 내가 저희들 꾀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그래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는 자기들끼리 멀리 가서 살려고? 고약한 놈들
    그는 화가 치밀어 신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저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해 봐라
    그런데 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금의 명(命)에 따라 병정들이 막 무덤을 파려 할 때 임금을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
    아니 처녀의 목소리가 …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이부종사를 한 죄많은 소녀, 죽음으로써 지아비에게 사죄함을 얻으려고 이렇게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마마는 어찌하여 소녀를 괴롭게 하시옵니까? 원하옵건대 차후로는 소녀를 괴롭히지 마시옵소서
    처녀의 목소리는 슬프게 멀리멀리 퍼지더니 차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놀란 연산군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쳤다.
    너희들은 그 처녀의 혼을 못 보았느냐?
    못 보았사옵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옵소서여봐라! 그 무덤을 다시 전과 같이 덮고 곱게 다듬어서 비석을 세운 다음 왕후묘(王后墓)라 부르도록 하여라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후묘(王后墓)는 임자없는 무덤이 되어 버렸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Gwanaksan of wanghumyo Gwanaksan (冠 岳山) gwacheonhyeon the Joseon Dynasty (果 川 ?) of the Jinshan (鎭 山) said. This place Gwanaksan (冠 岳山), which has one of the rocks on the mountainside, this wanghumyo (王后 墓) is called the. For the following comes from a legend. Joseon's 10th imgeumin Yeonsangun the thick woods and scenic Gwanaksan (冠 岳山) and enjoy the hunt went on. One day, a few people here accept the wage naseotneunde hunting, just the foot up the mountain to a stream geonneoryeo deals overseas. Yeonsangun not think that somehow a stream crossing beyond the wash-stand just looking at that, so tired of waiting and opened the Nash finally speechless. My lord, what brings you prefer not to cross a stream coming? Suddenly feel like you went hunting, and Toda Sunny weather is the weather brings you to kill a great hunt, and when do I not want? Nash's mind, I just did not know inlays. Yeonsangun then said, pointing the way to wash. You a virgin how to wash their eyes Do you see there? Do you see the beauty? Or baksaekeuro Do you see? Tell me boryeotda Charge, although the village maiden of the Wu ye give jeolsaekin ahroeohyeoksi gwain (寡人) must guess the snow Yeonsangun of satisfying laughter turned to the mouth. The laundry was a stupid girl half a dozen hunters looking for him to glance at glance at what's not loud, I THOUGHT I was afraid I will gild juseomjuseom laundry was rush home and rush pace. Finish it this far is Yeonsangun Boy, that girl on the back of the house ohryeotda learn. Gwain (寡人) tonight in the beautiful village maiden, with hojeokhan hoepo seen that I have to go and observe closely to see was a virgin. The home heolrebeoltteok dalryeoohneun a surprise to see her mother asked the girl. Hey, why is not this rush off to the laundry 5 is it? 12 Have you got any? Mother, there were several hunters Why I'm right behind him. Check it out When you hear the vision of Jamie hoofbeats yoranhi the girl's house, stopping in front of hunters dressed in her mother's maiden Jang said several people walked. Yeobosioh, wife, mother of the girl, now that you? Yes geureohaop committed something wrong, but it's a little, because I invite people to 25 Inlays The woman at the end of the concerned faces light gamdolatda amazed surprise. Yes? Inlaid is your ... I come to hunt inlaid into this place all night parting that day shall go where a room is clean house and to institute a freezing Inlaid you stay so humble noticed ... Anyway, my home, the Spirit of His Majesty the King (令) hasioh Is it too sudden to surprise on the woman, but I just did not know what to do. Ah! Maybe this thing jotdam Oh, Oh, and one more thing, I shall take you to a virgin tonight, inlaid with marquetry and clean bathing and grooming Let each of us into your sleeping quarters My daughter? How young is inlaid with five Shall serve? Moreover, it raised a storm cheoleopyi are not around or gets something wrong. If you have a little mistake ... Girl's mother wept the man holding the hem of the matter said. However, the measure of a man they did not. Eomyeong 25, so hurry'm ready to go soon to know the sky really was nohal 12. Both mother and daughter to that place and just sit here and heuneukkimyeo mother, the fact that if you kill me, and you'll die knowing manwooga a virgin betrothed to the bottom of the town and the man will manwooraneun. Before long, waiting for nightfall refurbished virgin Yeonsangun entered the room. Saw the girl lying on the incoming ahraetmok Yeonsangun, the This mountain of a woman like you, ye will not believe the best is done. Come here, come closer And hand of a virgin girl crying when trying to have noticed. No, no crying, why are you crying? Yeonsangun hit the hotong. This was a virgin until the end of his head gently bowed his head heuneukkideon deulmyeo sanggamkke ahroeeotda quiet. Inlaid Mama, the girl has already promised 100 years of self-medication as a momyiopnidayakhonjaga jiahbi are still fine. I'm my father to everyone, I want to do the job manin has raised those who are absolute. So, put it in place. Go The girl's fiance, listening to the news manwooneun dwineutgeya rolled frantically to enter the house of a virgin, but, at the door of soldier jikyeoseon tteomilmyeo not block the wind could not find hardly a virgin. Sweet girl in a drunk and he Yeonsangun to see a room with a rock up and see that room. The heart was beating and wailing. But even as my salary, and ppaeatdani ahnyeoja Eight others, really is a dirty world. She's also talking about one another's disposal is the king Wontonghan had really happened. The anger exploded barely eoknulreotda manwooneun closets. Pay her for the right tackle was feeling hungry. After such a sad incident, while holding the wound was a virgin and manwooneun marriage. For awhile after that Yeonsangun Gwanaksan (冠 岳山) to go hunting, according to the virgins to meet goseo hwangung were used. Seeing that her husband faced a virgin these days every time I felt guilty bosom. Nateuro tonight and what I have daehana diego? So I'd rather die than willing to throw away and live on a hill behind her neck hung a lot of paulownia and went hajik world. Manwooneun found the body of his wife back home so much money and it did not come out as tears. To ask his wife's body under a rock manwooneun painful wound to hold the abandoned tracks hid. Since then, he saw a man who did not live. This could happen after the virgin Yeonsangun the story, stopping at the house of scandalous things, not I fall for our own good sometimes Do you think guys? I was dead and spreading false rumors that he went to live away from each other? Nasty bastards His anger to scream at officials. Men! He dug a grave for the bodies look out But a strange thing happened this time. Name of the King (命) soldier of the king just call when the grave paryeo girl's voice was heard from somewhere. Inlaid mama, mama inlaid ... No girl's voice ... Yeonsangun is startled. Inlaid mama, up to half-a sinful girl, to death by jiahbi hameul to get an apology has been so hajik world. Mama was a girl, why do I like to suffer? Further include a monument to the girl's troubling you want to drink 옵 deliver Girl's voice went sadly meolrimeolri Fuzzy deoni gradually disappear. 12 could not be strange indeed. Meanwhile, Nolan Yeonsangun Next thing you know for a while until you hit the sound. You never saw the girl's spirit is it? Excuse not seen. Inlaid Ma'am, Calm yourselves! Men! The tomb is covered with finely polished before re-invented the next monument on wanghumyo (王后 墓) to call and go to After that had happened, the dethronement became Yeonsangun wanghumyo (王后 墓) without the owner has become a grave.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 冠岳山のワングフミョ 冠岳山(冠岳山)は朝鮮時代果川?(果川?)の珍しい山(鎭山)だった. こちら冠岳山(冠岳山)の山中腹に岩が一つあるのに, これをワングフミョ(王后墓)だと呼ぶある. これに?しては次のような??が?わる?る. 朝鮮時代の十番目賃金である燕山君は森が鬱蒼だ, 景色が美しい冠岳山(冠岳山)で狩りを?しむ通った. 一日は賃金が?示何人を連れる狩りを出たが, ちょうど住んだ岸を上がって小川の水を渡ろうと思う時であった. 燕山君はどうする事か?を渡るつもりはないあちらの方にあるパルレトのみを眺めるあるので待ってからくたびれた?示が遂にくちを切った. 電荷, 語である事で?を渡らないから? 急に狩りをするたい考えがいらっしゃってりおこるのがのどかで狩るのが大?良い天?なのに語である事で狩りをするたくないから? 出す象眼の心がまったく分からなかった. その時燕山君はあちらパルレトを示しながら言った. 君たちの目にはあそこで洗濯する娘がどんなに見えるのか? 美人と見えるのか? それとも薄色と見えるのか? はやく言って見るだろうな電荷, たとえ里の娘イオや天下の絶色であるとはアルェオも寡人(寡人)の目が間違いないね燕山君の口元に?足な笑いが浮かんだ. 一方, 洗濯した娘はなぜ狩人5,6人が自分をちらちら眺めるのが何やら尋常ではなくて, 恐ろしい考えが立ち入るした洗濯を無意識的に持って行かれる急に家でかけることを急き立てた. ちょうど遠くからそれを見た燕山君はものもう, あの娘の後に付いて行く家を調べる?るだろうな. 寡人(寡人)が今夜は?籍した里で麗しい娘といっしょに?抱を解くボアヤゲッダする, 娘を注意深く目を注ぐのだった. 一方, 家に息を切らして?けて?る娘を見た娘のお母さんが夕?けなので問った. この子よ, どうして洗濯を止めるこんなに急に走って?るのか? 何の事でも生じたか?お母さん, あそこなぜ狩人三四人が私の後を付いて?るある. あれ見てくださいこの時騷騷しく聞こえた馬の蹄音が娘の家の前で止めて狩人調えることの?丁三四人が娘のお母さんに?を掛けた. ヨボシオ, ?さん, あなたがあの娘の母親になります?はいさようでございますだけオリンのが何の過ちでもやらかしたんですか?私は象眼が仕えるある人だこの言葉に女人はびっくり驚くべきで顔には憂わしい光が漂った. はい? 象眼ママの … 今日象眼がこちらで狩りにいらっしゃってから日が暮れるひと晩をここで止宿するいらっしゃるはずだから部屋一つきれいに用意するようにします象眼がこんなにむさくるしい私の家に泊まるなんて … とにかく象眼の零(令)だからそのままするようにハシオノムナも突然の事に女人は驚くだけどうすると良いか知れなかった. ?! この事をもしかしたらゾッダムさて, そしてまた一つ, あの娘が今夜象眼が仕えるはずだからきれいに風呂に入る身繕いをして象眼の?所に入れるようにしなさい私の娘を? オリンのがどんなに象眼を麻?ましょうか? その上に山の中で頑是無く定木と言うのになる何の過ちをやらかすかモルオブニだ. オリン蟹間違いでもすれば … 娘のお母さんは男たちの小づまを取る泣きながら泣いて?んだ. しかし男たちは聞いた振りをしながらもしなかった. 御名です, はやく早く用意するようにソドルロは下午本?で空が分かれば怒る事だった. 二つの母女はそのままその席に座りこんでフヌキミョオモだから, もしこの事?を万優が分かれば日殺す自分も死ぬゴイェヨイ娘は下の村の万優という男と?定めをしたのだ. やがて夜になると飾りつけた娘は燕山君が待つある部屋に入って行った. 下の目に?になって娘が入って?ることを見た燕山君は, こんな山里にお前みたいな天下第一の女人のいることは本?に分からなかった. はやくこちらへ身近に?いして, 娘の手を引っぱろうとする時娘が泣くあることを?付いた. いや, 泣くことはどうして泣くのか? 燕山君は大どなりを打った. この時まで首を下げるむせんだ娘はこの言葉にそっと頭をあげて象眼に?かに申し上げた. 象眼ママ, 少女はもう百年佳約を約束した者がいるモムイオブニダヤックホンザではないジアビがあると言っても良い. 私は万人の?親です, 万人は私がしたところでする仕事を逆うことオブドだ. だからはやく席に入る. はやく一方, 娘の婚約者万優は?くこの消息を聞く狂ったようにダルリョワで娘の家に入って行こうと思ったが, 門前に見詰めた兵丁たちが押しながら阻むせいで到底娘に?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 彼は娘と燕山君が?しさに?っている部屋を見るためにその部屋が見える岩に上がった. それからは胸を打つ泣き喚きをした. 私のいくら賃金だと言うが, 他人の?女子をうばうだからエイッ, 本?に汚いやつの世の中だ. ?王なら他人の女も勝手にしたという言葉なのか本?に口惜しく怨めしい事だった. 万優は出ようとする鬱憤をやっと押えつけた. すぐに賃金にダルリョドルゴプン心情だった. そういう事がある後悲しい傷を抱いたまま娘と万優は婚姻をした. 燕山君はその後でもときおりずつ冠岳山(冠岳山)で狩りを出たあとは娘をマンナゴで還宮をするした. このような事で娘はご主人を向い合って?する度に胸深み自責感を感じた. 私は何の顔面で今夜も若旦那を?するか? こんなに住むところにはかえってズックオボリザグリゴは後方の山桐に首を結ぶ一多くの世の中を去る?いた. 家に?って?た万優は妻の死骸を見つけるあまりにもおびただしい事なので?も出なかった. 万優は妻の死骸を岩下にムッゴは胸が痛む傷を煮こまない影をひそめる捨てた. その後で彼を見たという人は一人もいなかった. そんな事がある後に燕山君が娘の家に立ち寄るその話をドッゴソグェシムしたものなど, いや私が私ども謀にだまされることができるのか? そう死んだと?りうわさをポトリゴは自分たちどうし遠く行っていかす? 膏?したやつら彼は怒りがこみ上げる臣下たちに大?を出した. ものもう! あの墓穴をなが?で死骸を確認して見るところでこの時?な事が起こった. 賃金の人(命)によって兵丁たちがちょうど墓穴をほろうと思う時賃金を呼ぶ娘の?がどこかで聞こえた. 象眼ママ, 象眼ママ … いや娘の?が … 燕山君はびっくりした. 象眼ママ, 二部?事を一罪深い少女, 死としてジアビに謝罪することを得ようとこんなに世の中を去りました. ママはどんな理由で少女をつらいようにするから? 願うが今後では少女をいじめない娘の?は悲しく遠く遠く?がったら徐?に消える捨てる?いた. まことに奇妙な事に違いなかった. 一方, 驚く燕山君はしばらく後こそ我に返る大?で叫んだ. 君たちはその娘の魂が見られないgか? くぎボアッサオブニだ. 象眼ママ, ゴゾングハシオブソソヨブァだと! その墓をまた前と一?に覆うきれいにダドムオで碑石を建てる次ワングフミョ(王后墓)だと呼ぶようにしなさいそういう事がある後, 燕山君が?位されるとワングフミョ(王后墓)はイムザオブヌン墓になる捨てた.

  • 연주암의 눈물

    연주암의 눈물

    보부상 두령뽑기

    【사진】(박성환 작), 의상대(義湘臺)·관악사(冠岳寺)를 창건하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관악산(冠岳山)은 조선시대 과천현(果川縣)의 진산(鎭山)이었다.
    이 곳 관악산(冠岳山)의 산 중턱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왕후묘(王后墓)라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의 열 번째 임금인 연산군은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즐겨 다녔다.
    하루는 임금이 내시 몇 사람을 데리고 사냥을 나섰는데, 막 산 기슭을 올라 냇물을 건너려 할 때였다. 연산군은 어찌된 일인지 내를 건널 생각은 않고 저쪽 편에 있는 빨래터만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기다리다가 지친 내시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전하, 어인 일로 내를 건너지 않으시옵니까?
    갑자기 사냥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셨도다
    일기가 화창하여 사냥하기가 더없이 좋은 날씨인데 어인 일로 사냥을 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내시는 상감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연산군은 저쪽 빨래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저기서 빨래하는 처녀가 어떻게 보이느냐? 미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박색으로 보이느냐? 어서 말해 보렷다.
    전하, 비록 촌락의 처녀이오나 천하의 절색인 줄 아뢰오역시 과인(寡人)의 눈이 틀림 없구나
    연산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돌았다. 한편, 빨래하던 처녀는 웬 사냥군 대여섯 명이 자기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아,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하던 빨래를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급히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 멀리서 그것을 본 연산군은 여봐라, 저 처녀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보고 오렷다. 과인(寡人)이 오늘밤은 호적한 촌락에서 아리따운 처녀와 더불어 회포를 풀어 보아야겠다하고, 처녀를 유심히 눈여겨 보는 것이었다.
    한편,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딸을 본 처녀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빨래를 하다 말고 이렇게 급히 뛰어오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어머니, 저기 웬 사냥군 서너 명이 제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이 때 요란히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처녀의 집 앞에서 멈추며 사냥군 차림의 장정 서너 명이 처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부인, 당신이 저 처녀의 모친 되시오?예 그러하옵니다만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나는 상감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이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며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았다.
    예? 상감마마의 …
    오늘 상감이 이 곳으로 사냥을 오셨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여기서 유숙하고 가실 것이니 방 하나 깨끗히 마련하도록 하오
    상감께서 이렇게 누추한 저의 집에 머무르시다니 … 아뭏든 상감의 영(令)이니 그대로 하도록 하시오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여인은 놀랄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아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처녀가 오늘밤 상감을 모실 것이니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하여 상감의 침소에 들여 보내도록 하시오
    제 딸을요? 어린 것이 어떻게 상감을 모시오리까? 더구나 산중에서 철없이 자란 것이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옵니다. 어린 게 실수라도 하면 …
    처녀의 어머니는 사나이들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명이오, 어서 빨리 준비되도록 서둘러야 하오정말로 하늘이 알면 노할 일이었다. 두 모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흐느끼며어머니, 만약 이 사실을 만우가 알면 날 죽이고 자기도 죽을 거예요이 처녀는 아랫 마을의 만우라는 사나이와 정혼을 했던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단장한 처녀는 연산군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누워서 처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산군은,
    이런 산골에 너 같은 천하 제일의 여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도다. 어서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하며, 처녀의 손을 잡아 끌려고 할 때 처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울긴 왜 우느냐?
    연산군은 호통을 쳤다. 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처녀는 이 말에 살며시 머리를 들며 상감께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소녀는 이미 백년가약을 약속한 자가 있는 몸이옵니다약혼자가 아니라 지아비가 있다 해도 괜찮다. 나는 만인의 어버이요, 만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거역할 수 없도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 들라. 어서
    한편, 처녀의 약혼자 만우는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미친듯이 달려와서 처녀의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앞에 지켜선 병정들이 떠밀며 막아서는 바람에 도저히 처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와 연산군이 단꿈에 취해 있는 방을 보기 위해서 그 방이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지만, 남의 아녀자를 빼앗다니 에잇, 정말로 더러운 놈의 세상이다. 국왕이면 남의 계집도 마음대로 한단 말이냐
    정말로 원통한 일이었다. 만우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장에 임금에게로 달려들고픈 심정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슬픈 상처를 안은 채 처녀와 만우는 혼인을 하였다. 연산군은 그 뒤로도 이따금씩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나왔다가는 처녀를 만나고서 환궁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일로 처녀는 남편을 마주 대할 때마다 가슴깊이 자책감을 느꼈다.
    나는 무슨 낯으로 오늘밤도 서방님을 대하나?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그리고는 뒷산 오동나무에 목을 매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바위 밑에 묻고는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연산군이 처녀의 집에 들러 그 이야기를 듣고서괘씸한 것들, 아니 내가 저희들 꾀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그래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는 자기들끼리 멀리 가서 살려고? 고약한 놈들
    그는 화가 치밀어 신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저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해 봐라
    그런데 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금의 명(命)에 따라 병정들이 막 무덤을 파려 할 때 임금을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
    아니 처녀의 목소리가 …
    연산군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이부종사를 한 죄많은 소녀, 죽음으로써 지아비에게 사죄함을 얻으려고 이렇게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마마는 어찌하여 소녀를 괴롭게 하시옵니까? 원하옵건대 차후로는 소녀를 괴롭히지 마시옵소서
    처녀의 목소리는 슬프게 멀리멀리 퍼지더니 차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놀란 연산군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쳤다.
    너희들은 그 처녀의 혼을 못 보았느냐?
    못 보았사옵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옵소서여봐라! 그 무덤을 다시 전과 같이 덮고 곱게 다듬어서 비석을 세운 다음 왕후묘(王后墓)라 부르도록 하여라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후묘(王后墓)는 임자없는 무덤이 되어 버렸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Yeonjuam tears
    Brass of the meeting (上 峰) yeonjubong (戀 主峰) is behind the leading cheopcheop (幽 遂 ??) of simgok (深谷) overlooking the location as well as the circumstances jeomhaeteul (寺 庭) on Vista (眺望) is Each outstanding peaks Rocks (奇岩), in point of rocks (怪石) made to the Mt zinc, a sense of excitement that deun yeonjuam (戀 主 庵) of 44 (寺 史) must legally grandeur sammak Lorna (三 幕) and tie the largest temples (巨 刹) is.
    Yeonjuam (戀 主 庵) history of 1,320 years ago, Silla 30 Munmu (文武 王) 17 costumes in metabolism (? 湘 大?) that was founded, Changsha (? 寺) was the mission of (寺 名) the gwanaksa (冠 岳寺) is, the location of the place was not here.
    From now, 570 years ago, my three Korean Taizong (太宗) 11 in the best Jay Aguda wangjain Meitoku (? 寧 大君) and hyoryeongdaegun (孝 寧 大君) of the current 24-digit (移寺) is let.
    Hyoryeongdaegun (孝 寧 大君), especially gwanaksa (冠 岳 寺) to 24 (移 寺) to the stands There was a hidden sorrow. Aguda (太祖) the best, Jay over the way the prince of a third party (第三者) is chungnyeongdaegun (忠 寧 大君) to the avant-garde (? 位) in your plan to have the means, both the other hand army Hold the tears meogeumeumyeo palace (王?) out of the way his feet are left wandering the street. The Prince, right in the house broken (雨露), or avoid, or at the summit that day balhimyeo brother brother brother brother for another several months or hemaegi gamyeo mountain mountains where suddenly stopped Brass foot summit (冠 岳 山?) said. But does not think that you do not want the two royal princes (王?) directly overlooking the summit (山?), rather than the invisible palace gwanaksa (冠 岳 寺) may enter (修道) thought you would be better had it come.
    However, more appear to forget the throne (王座) aeryeonhan s sense of memories and Tokyo have long pressed enclosed (憧 峰) as section 24 to move into position now (移 寺) has a. The prince, however, always calculating the trail (山?) was transferred to. Thus, old (世人) 22 The Prince of heart (心境) calculating the Aurora Brass engraved (冠 岳 山?) and yeonjudae (戀 主 台) grown to LA, Mission (寺 名) Unbeknownst to yeonjuam (戀 主 庵) as was referred to.
    Give up the crown prince best Meitoku, but the damn about the crown end hyoryeongdaeguneun Less Gwanaksan (冠 岳山) to leave but could not finish it while sitting on a throne and wanted the foot of the Shorin Brass (冠 岳 山麓) went on to be buried.
    44 (寺 史) the yeomal (A 末) of dumundong (杜 ? 洞) 72 people (人) on seogyeon (徐 甄), nameuljin (南 乙 珍), gangdeukyong (康 得 dragon), and in rebellion against the Yi Seonggye Brass fed up (冠 岳) went to one seogyeon (徐 甄) and the rest only practical (? ?) Without the AM (??) is it's not.
    Anyway, the main peak (主峰) in yeomalseoncho (A 末 ? 初) passengers are complaining of the Week (主) has to miss playing the spread, also known as bee comes.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主庵の? 冠岳の再?(上峯) ?主峰(?主峰)を背後に至高流水??(幽遂??)の深谷(深谷)を見下ろす位置を占めただけでなく事情(寺庭)から眺望(眺望)になるずば?けた峰ごとに奇岩(奇岩)であり, 怪石(怪石)でイルオジョで?鉛金鋼山の中に入った行くことを催すようにする?主庵(?主庵)は師事(寺史)でもウングデハムでもサムマック(三幕)と喩える巨刹(巨刹)だ. ?主庵(?主庵)の?史は 1,320余年の前新羅 30大文武王(文武王) 17年にイサン大師(義湘大師)が創建したし, 創社(創寺) ?時の使命(寺名)は冠岳社(冠岳寺)なのに, 位置は現在の席ではなかった. 今から 570余年前朝鮮第3代太宗(太宗) 11年に太祖の第一^J王子であるヤングニョングデだね(?寧大君)と孝寧大君(孝寧大君)が現在の席に引っ越し(移寺)させたのだ. 孝寧大君(孝寧大君)が特に冠岳社(冠岳寺)に引っ越し(移寺)をするように志したところには他人が分からない悲しみがあった. 太祖(太祖)が第一,第二義王子をビキョノッゴ第三者(第三者)であるツングニョングデだね(忠寧大君)に前衛(?位)する意味を持つあることを?づく, 羊大軍はお互いに手を握る?をのんで王宮(王宮)を?する足ダッヌンどおり放浪の道を?ったのだ. 傷心した二人の王子は民家で迂路(雨露)を避けるとか, あるいは算定で日を明らかにして兄さんは一?にする弟は兄さんをお互いにためになって行って山から山に迷うのを多くの煎じふと足を止める所が冠岳算定(冠岳山頂)だった. ところで二人の王子は見ない考えなければ王宮(王宮)がすぐ見下ろされる算定(山頂)よりは王宮が見えない冠岳社(冠岳寺)に入って行く首都(修道)をすることが優れるはずだ思った. しかし忘れようと思うほど現われる王座(王座)への哀れな踊る東京の情を押すあてがない同封(憧峯)で寺を移そうと今の席に引っ越し(移寺)をさせた. ところが二つの王子の足はいつも算定(山頂)で移した. そして世人(世人)がこの二つの王子の心境(心境)を刻みこむ冠岳算定(冠岳山頂)を?主台(?主台)だと呼んだし, 使命(寺名)も知らず間に?主庵(?主庵)と指?するようになった. 制である王子ヤングニョングデグンは王位を諦めたが, 孝寧大君は結局王位に?する情を忘れない冠岳山(冠岳山)を去るまでしたが結局王座に座って見られなかったまま恨みが立ちこめた冠岳山麓(冠岳山麓)につける?いた. 師事(寺史)には麗末(麗末)のトゥムンドン(杜門洞) 72人(人)で西犬(徐甄),?るかは(南乙珍),ガングドックヨング(康得?) などが李成桂の謀反に反感を抱く冠岳(冠岳)に入って行ったと言うが西犬(徐甄)だけがある?りは?技(?記)にないから午前(誤?)ではないかと言う. とにかくこの主峰(主峯)から麗末扇?(麗末鮮初)の不平客たちが株(主)をしのんだと言って演奏峰とも?わる?る.

    (『??だ(??誌)』, 京畿道)

  • 새술막 마을

    새술막 마을

    새술막 마을

    (곽영민 작),
    【사진】새술막 풍경(風景)

    예로부터 삼남지방(三南地方: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한양을 가자면 지금의 수원을 지나 과천을 거쳐야만 되기 때문에 이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과거를 보러 올라오는 선비들 역시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길을 통하여 한양에 이르렀으며, 실패의 쓰라린 아픔을 안고 낙향하는 사람도 이 곳 과천을 경유하여야 되었기에 과천은 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 관아(官衙)가 있었던 관문리(官門里)를 내점(內店)이라 하고 새술막 쪽을 외점(外店)이라 하였다.
    외점(外店) 새술막은 내점을 오기 전에 들러 술과 음식을 찾는 이들이 많음으로 이들을 상대로 하여 도로변에 술집이 많아지면서부터 이 곳을 새술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Samnam region since ancient times (三 南 地方: Chungcheong, Jeolla, Gyeongsang-do) to go to Hanyang in the past now, Gwacheon until after the Suwon, because the length was the only pathway. Scholars also see the past coming up with a dream Chungwoon Hanyang through this road was reached, the failure of the bitter pain of those who hold this place nakhyang be via Gwacheon Gwacheon doeeotgie was the gateway to the Hanyang.
    Gwacheon government office (官衙) there was gwanmunri (官 ? 里) and naejeom (? 店) is called saesulmak oejeom side (外 店) was called.
    Oejeom (外 店) naejeom wine in the membrane before they stop looking for food, plenty of alcohol, as against those that grew from a roadside bar in the wine in this place was just about to call me.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昔から三南地方(三南地方:忠?道·全羅道·慶?道)から漢陽に行こうとすると今の水原を通る果川をゴチョヤだけなるからこの道がユイルハン通路だった. 過去を見に上って?る士たちも?雲の夢をかかないk道を通じて漢陽に至ったし, 失敗の疼いて辛い痛みを煮こまない都落ちする人もこちら果川を?由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果川は漢陽の?門だった.
    果川官煬(官衙)があった?門里(官門里)を?店(?店)というセスルマックの方をウェゾム(外店)といった.
    ウェゾム(外店) セスルマックは?店を?る前に立ち寄るお酒と食べ物を?す人?が多いことでこれらを相手にして道路周?に居酒屋が多くなってからこちらをセスルマックと呼ぶようになったと言う.

    (『??だ(??誌)』, 京畿道)

  • 찬우물 마을

    찬우물 마을

    찬우물에 가자하는 정조

    (곽영민 작),
    【사진】찬우물에 가자(加資)하는 정조(正祖)

    조선 역대 제왕 중에서 효성이 지극한 22대 정조대왕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수원 현륭원(顯隆園)의 선친 묘를 참배하러 과천을 지나는 도중 이 마을에 이르렀을 때, 갈증이 심하게 났는데 신하가 이 근처 우물물을 떠 정조께 올리니 정조가 이 물을 마시고 난 후 물이 참으로 차고 맛이 좋다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정조는 이 우물에 가자당상(加資堂上:정3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려 임금님이 직접 관리하게 한 곳)을 제수(除授)하였으며, 그 후로 이 우물은 가자(加資)우물로 불리어졌고,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하여 찬우물이라고도 일컬었다.
    또한 이 마을은 찬우물이 있다 하여 찬우물마을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Hyosung Corporation, King of Korean history jigeukhan 22 chastity which Maharaja hot summer hyeonryungwon Suwon (? 隆 ?) visits the grave of the father while going through a Gwacheon reached the village, when the subjects woke severe thirst with water from a well near Open this jeongjokke olrini chastity after drinking the water tastes good cold water, and indeed was highly praised.
    Well then come to the virtue of this is yours (加 ? 堂上: Capsules Item 3 above the rank up one place to manage the King himself), the divisor (除 授) has, since then the two go well (加 ?) as well temper was brought to chadago Oh, that has good water, known as ilkeoleotda chanwoo.
    The town is also the water chanwoo chanwoo became to temper the water to the village.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朝鮮?代帝王の中で孝誠が至極な 22台正祖大王がどの蒸し暑い夏の日水原ヒョンリュングワン(顯隆園)の先親畝を?拜しに果川を通る途中この村に至った時, 喉の?きがひどく出たが臣下がこの近く井物を外す情調にあげたら情調がこの水を?む私は後水がまことに冷たい味が良いと言って??を惜しまなかった.
    ?時情調はこの井に?御母堂上(加資堂上:本?に3身幅以上に品階をあげる王?が直接管理するように1ヶ所)を除?(除授)したし, その後にこの井は行こう(加資)井と呼ばれる, ムルマッが良い冷たいと言ってチァンウムルとも?えた.
    またこの村はチァンウムルがあると言ってチァンウムルマウルで不利御旨なのなったと言う.

    (『??だ(??誌)』, 京畿道)

  • 강득룡의 유택

    강득룡의 유택

    과천시 중앙동(현 정부제2종합청사 뒤)에 자리잡고 있는 안정공(安靖公) 강득룡(康得龍)의 유택은 주산(主山) 관악산(冠岳山) 남쪽 줄기로 뻗어 내려 건해우선용(乾亥右旋龍)으로 임입수(壬入首) 해좌사향(亥座巳向)이다.
    물은 정미(丁未)병오(丙午) 양쪽에서 득수(得水)가 되어 을진파(乙辰破)로 흘러간다.

    산세는 관악산 남맥(南脈)인 중심 맥이 여러 번 기복(起伏)하면서 내려 뻗은 용세(龍勢)로 좌우 겹겹이 용호(龍虎)를 이루어 놓았다.
    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다.
    주용(主龍)이 금국(金局)으로 농후(農厚)한 용세(龍勢)를 갖추어 닭의 몸을 이루었고, 전면 조안산(朝案山)은 수 백 봉우리가 팔백형화(八百炯火)와 수 백 분대(粉袋)를 이루어 내조(來朝)하였으니 형국이 매우 광활하다.
    삼길육수(三吉六秀)의 묘한 영봉들이 사방으로 격을 이루었고, 넓은 들 복판으로

    여러 물이 합금(合襟)이 되어 혈(穴)을 감싸고 흘러간다.
    수 백년 후에는 후손들이 더욱 왕성하게 번창할 자리이며, 부귀(富貴)를 아울러 갖춘 큰 명당자리이다.
    모든 강(康)씨는 동조(同祖)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강(康)씨의 득성조(得姓祖)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때에 기자(箕子)의 막료였다는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고대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이다.

    그는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외육대조(外六代祖)로 전하여 진다.
    『고려사(高麗史)』·『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의하면,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서 스스로 성골(聖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부터 각처를 유랑하다가 송도(松都)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또 아들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寶育)이 곧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고조부(外高祖父:일설 외증조부)로서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뒤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追尊)된 분이시다.
    그러나 강(康)씨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라 할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은 고려 고종조(高宗朝) 몽고 침입 때의 호종공신으로서 충렬왕(忠烈王) 때에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이 때부터 신천(信川)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의 모든 강(康)씨는 곧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으로서 곡산(谷山) 강(康)씨의 중조(中祖) 강서(康庶:象山伯)는 육세(六世), 재령강씨(載寧康氏)의 중조(中祖)인 강득룡(康得龍)은 이태조(李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친오라버니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으나 조선(朝鮮)이 건국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품고 관악에 은거, 연주암(戀主庵)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戀主臺)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태조(李太祖)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안릉(安陵)은 재령(載寧)의 옛 이름)에 봉하였고,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고, 그의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하였다.

    그 밖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며, 현근대(現近代)에도 관리·교육가·산업가들이 왕성히 번창하고 있다.
    이는 관악산 밑에 자리잡은 안정공(安靖公) 강득룡(康得龍)의 충절에 기인하는 바 크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Gwacheon, Jungang-dong (currently the General Office after jeongbuje 2) located in the anjeonggong (安靖 公) gangdeukryong (康 得 dragon) in the yutaek jusan (主 山) Gwanaksan (冠 岳山) stretches south to the stem down geonhaewooseonyong (干 亥 右旋 dragon) and imipsu (壬 入 首) haejwasahyang (亥 座 巳 向) said.
    Water 정미 (丁未) byeongoh (丙午) deuksu on both sides (得 水) be euljinpa (乙 辰 破) flows into.

    San nammaek the Gwanaksan (南 ?) is the center several times, rolling pulse (起伏) down the stretch yongse (Dragon ?) layers influenced by ART (Dragon 虎) and has done.
    Hyeongguk the geumgyeporanhyeong (金? 抱 卵形) like the shape of a chicken is sitting.
    Prime Suspect (主 dragon), the geumguk (Kim 局) the thickening (? 厚) yongse 1 (Dragon ?) equipped with a chicken-made body, front joansan (朝 案 山) is a 800 hundred peaks miniaturization (八百 炯火) with hundreds of components (粉 袋) and made naejo (? 朝) for making hyeongguk is very spacious.
    Samgilyuksu (三 吉 六 秀) of square of the separation of odd-made sacred, in the midst of a wide

    Alloys Multiple water (合 襟) is a hole (穴) surrounding flows.
    After hundreds of descendants will prosper even more active place, and wealth (富?) and also is a place with a large ratio.
    All Rivers (康) Mr. Synchro (同 祖) is known.
    Korean Kang (康)'s deukseongjo (得 姓 祖) a reporter of Korea (箕子 朝?) when the reporter (箕子) of the Joint Staff was a gangsuk (康叔), and the legendary founders of the ancient hogyeong reach the Dragon (虎 景) be.

    He considers Aguda (太祖) oeyukdaejo of Wang (外 六 代 祖) will be preached to.
    『Goryeosa (高 A 史)』 『Dongsa Gangmok (? 史? 目)』 and that he himself as a man of the late Silla Reliquary (? 骨) ilkeoleumyeo General called, I was stranded in the various parts from baekdusan SIS (松 都) busosan (扶? 山) lived in the valley is situated.
    After gangchung (康忠) is the father of a son, insect (忠) The son of a nursery (? 育) and nateuni, the nursery (? 育) soon Aguda (太祖) Wang (王建) grandfather of the foreign language (外 高祖父: oejeungjobu some accounts), as Wang (王建) to consider the Great founded his wondeok (元 德 大王) as chujon (追尊) let old man.
    The River (康)'s real jungsijo (中 始祖) to chungryeolgong LA (忠 Yul 公) Ji yeon Kang (康 之 ?) considered gojongjo (高宗 朝) Mongolian invasion, as when hojong gongsin chungryeolwang (忠 Yul 王) when the Holy buwongun (信 城府 院 君: Holy (信 城) the Sincheon (信 川) of the old name) proved in a sealed since the Sincheon (信 川) in the main building was samge.

    Today, all the rivers (康) about Mr. Ji yeon Kang (康 之 ?) as descendants of goksan (谷 山) Kang (康)'s sodium bicarbonate (中 祖) Jiangxi (康 庶: 象山 伯) the yukse (六 世), jaeryeong Kang (? 寧 康氏) of sodium bicarbonate (中 祖) is gangdeukryong (康 得 dragon) is yitaejo (Lee 太祖) of gyebi (? 妃) sindeok Empress (神 德 王后) chinohrabeoniyida of. He's considered a citizen Dynasty (恭 愍 王朝) in 34 Usa (三 司 右 使) and jinaeteuna Korea (朝?) doemyeonseo the foundation's immortal (不 事 二 君) means the holding of retreats in Brass, yeonjuam (戀 主 庵) yeonjudae in everyday life (戀 主 台) up to the SIS (松 都) is looking at hayeotdago wailing.

    After yitaejo (Lee 太祖) anreungbuwongun him (安陵 府 院 君: anreung (安陵) the jaeryeong (? 寧) the old name) bonghayeotgo, anjeonggong (安靖 公) is a Seahawks (? ?) that's given, his heir jaeryeong (? 寧) gwanjeokhayeotda on.

    Many of the other person has been discharged, hyeongeundae (? 近代) in the management of education ^ ^ that the industry is thriving wangseonghi.
    Nestled under the Gwanaksan anjeonggong (安靖 公) gangdeukryong (康 得 dragon) are attributable to the loyalty of the large bar.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果川市中央洞(現政府制2?合?舍後)に位置づくあるアンゾングゴング(安靖公) ガングドックリョング(康得?)の幽宅は珠算(主山) 冠岳山(冠岳山) 南側幹で伸びる下るゴンヘウソンヨング(乾亥右旋?)で林入手(壬入首) ヘズァサヒャング(亥座巳向)だ.
    水は精米(丁未)^丙午(丙午) ?方でドックス(得水)になるウルジンパ(乙辰破)に流れる.

    山勢は冠岳山ナムメック(南脈)である中心脈が何回起伏(起伏)しながら下る伸びた?世(?勢)で左右畿重にも?虎(?虎)を成すおいた.
    ?態は禁戒抱卵型(金?抱卵形)でまるでニワトリが分かる抱くある形象だ.
    ?える(主?)が金?(金局)で濃厚(農厚)一?世(?勢)を取り?えるニワトリの身を成す, 全面粗案山(朝案山)は?百峰が八百?火(八百炯火)と?百分隊(粉袋)を成す?助(?朝)したから?態が非常に?闊だ.
    サムギルユックス(三吉六秀)の妙な?峰たちが四方で柄を成す, ?いら?ん中に

    多くの水が合金(合襟)になる血(穴)をくるむ流れる.
    ?百年後には子孫たちがもっと旺盛に?える席であり, 富貴(富貴)を同時に取り?える大きい明堂席だ.
    すべての川(康)さんは同調(同祖)で知られるある.
    我が?の川(康)さんのドックソングゾ(得姓祖)は記者朝鮮(箕子朝鮮) 時に記者(箕子)の幕僚だったというガングスック(康叔)で, 詩調は古代??上の人物である鎬京(虎景)だ.

    彼は高麗太祖(太祖) 王健のウェユックデゾ(外六代祖)で?えられる.
    『高麗史(高麗史)』『動詞綱目(東史綱目)』 などによれば, 彼は新羅末葉の人として自ら聖骨(聖骨)?軍と?えて, 白頭山から各所を漂泊している途中松都(松都) 扶蘇山(扶蘇山) 谷間に位置づく暮したと言う.
    後に姜?(康忠)と言う(のは)息子を生む, ?(忠)はまた息子保育(?育)を生んだら, この保育(?育)がすなわち太祖(太祖) 王健(王建)の外?語高等?校祖父(外高祖父:一?外?祖父)として王健(王建)が高麗を建?した後元?大王(元?大王)で追尊(追尊)になった方だ.
    しかし川(康)さんの?質的な中始祖(中始祖)だとするツングリョルゴング(忠烈公) カン?ジヨン(康之淵)は高麗高宗組(高宗朝) モンゴル侵入の時の綾?功臣として忠烈王(忠烈王) 時に神聖府院君(信城府院君:神聖(信城)は新川(信川)の昔の名前)に封ざれることでこの時から新川(信川)を本館にするようになった.

    今日のすべての川(康)さんはすなわちカン?ジヨン(康之淵)の子孫として谷山(谷山) 川(康)さんの重曹(中祖) 江西(康庶:象山伯)はユックセ(六世), ゼリョングガングシ(載寧康氏)の重曹(中祖)であるガングドックリョング(康得?)は異態組(李太祖)の?肥(?妃) 信?王后(神?王后)の親お兄?だ. 彼は高麗公民王朝(恭愍王朝)に三司優思(三司右使)を執り行なったが朝鮮(朝鮮)が建?されながら不事二君(不事二君)の意味を抱く冠岳に?居, 演奏庵(?主庵)に暮しながら?日演奏台(?主台)に上がって松都(松都)を眺めながら泣きわめいたと言う.

    後に異態組(李太祖)は彼をアンルングブワングン(安陵府院君:アンルング(安陵)は材令(載寧)の昔の名前)に封ずる, アンゾングゴング(安靖公)と言う(のは)諡?(諡?)を下げる, 彼の子孫は材令(載寧)に貫籍こんにちはだった.

    その外の多くの人物たちが排出されたし, ヒョングンデ(現近代)にも管理^?育家^産業家たちが盛んに流行っている. これは冠岳山下に位置づいたアンゾングゴング(安靖公) ガングドックリョング(康得?)の忠節に起因するところ大きい.

    (『??だ(??誌)』, 京畿道)

  • 망경대의 한

    망경대의 한

    막계동(幕溪洞) 과천 서울대공원 뒤에 있는 산이 청계산(淸溪山)이다. 청계산의 옛 이름은 청용산(靑龍山)으로 이 산정에서 청용(靑龍)이 승천했다고 전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산중에 고찰(古刹)이 있으니 통일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고려 말기의 중신(重臣)으로서 박학(博學)하기로 그 이름이 높았던 이색(李穡)이 일찍이 이 곳을 찾아 읊은 시와 조선 초기의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의 시가 있다.

    이 산정에 석대(石臺)가 하나 있으니, 이 석대가 바로 망경대(望京臺)이다.
    망경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이 곳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고려말을 지나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에 그야말로 대지팡이와 짚신 차림의 초라한 선비 하나가 이 만경대에 오른 후로는 만경이 망경(望京)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이 행색이 초라한 선비가 바로 고려 중신(重臣)의 한 사람인 조윤(趙胤)이었다.

    조윤(趙胤)은 이집(李集)·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빛내던 명유(名儒)로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趙浚)의 친 동생이기도 하다. 고려의 신하이던 이성계가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지금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 하던 명신(名臣)들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유교사상에 젖어, 이색을 위시해서 조윤^길재등이 이성계에게 등을 돌리고 청계산을 찾은 것이다.

    이성계에게는 정도전·조준·배극렴 등이 따랐을 뿐 명신(名臣)들은 두문동(杜門洞)으로 삿갓을 쓰고 사라지고, 국민들은 정권의 교체에 본안하여 철시(撤市)를 하고, 송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정도전(鄭道傳)이 궁여지책으로써 과거를 통해 인재를 구하기로 하고 널리 과거 통문(通文)을 냈으나 문과·무과에 응시한 것은 시골뜨기 밖에 없었다.
    이 때 이색이 초청을 받았다. 이색이 궁에 들자 이성계는 친히 나아가 맞아들였으나 왕좌에 오른 것을 본 이색은 구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음이요, 형에게 신도(臣道)를 다 하러 찾았음은 결코 아니외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물러났고, 길재는 신 왕조에서 내린 박사(博士)의 칭호도 물리치고 입궐도 않은 채 양모차(養母次) 입산한다는 편지만 전하고 사라졌다. 김자수(金自粹) 또한 5·6차의 초청에 못이기어 사당(祠堂)에서 최후를 고하고 음독자살로써 이성계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른것이 바로 조윤이었으나, 조윤은 자기의 이름이 조선 공신록에 오른 것을 보고 실소를 하며
    이는 형(조준)이 아우를 아낌이 아니라 아우를 욕함이 크외다하고 이태조에 붙은 형을 조롱하고서 이성계가 준 호조판서의 벼슬을 반환하였다. 그리고는 이름 윤(胤)을 견으로 고치고 자(字)를 종견(從犬)이라 했으니,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니 개와 같다 함이었다.

    아우 조종견(趙從犬)은 물러가오. 형은 역신의 영화를 길이길이 누리시오.형과 조선을 버린 조윤은 양주^광주의 깊은 산을 헤매며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이 곳이 바로 청계산정이었다.
    산정에서 굽어보니 때는 단풍이 한창 드는 가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나라와 임금을 잃고 헤매는 조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는 못했으니 멀리 송경(松京)에 사무친 정은 통곡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만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 어찌 죽지 못하노

    이렇게 송도를 바라보며 울다가 쓰러져 자고 하기를 수삭(類朔),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조윤의 슬픔에 동정하여 만경대(萬景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불렀다고 한다.
    조윤이 청계산에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성계는 그 충절에 깊이 감동하고, 그 충절을 이(李) 왕조로 돌려보기 위해 친히 청계산으로 조윤을 찾아 돌아오기를 수 차 권했으나 조윤은 멀리 송도를 바라볼 뿐 말 한마디가 없었다.

    이에 조윤의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이성계는 우리 왕조에는 역신이나, 그 뜻은 장한지고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돌아갔다. 그래도 조윤을 못잊어 산

    정에 초막을 지어 비와 이슬을 피하게 하였으나, 조윤은 이 또한 보기 싫다 하여 청계산을 떠나 양주(楊州)의 깊은 산으로 발을 옮기었다.
    이 초막이 오늘의 망경대(望京臺)이다.

    (『전설지(傳說誌)』, 경기도)

    Makgyedong (幕 溪 洞) after the Seoul Grand Park in Gwacheon Cheonggyesan acid (淸 溪山) said. The old name Cheonggyesan cheongyongsan (靑 dragon 山) in this calculation cheongyong (靑 dragon) is the name of this happened in front Emperor has ascended. Gochal rocks (古刹) was founded in the Unified Silla king did so, considering the end of the Miocene (重臣) as the erudition (博?) decided that name Abnormal high (Lee ?) find a place that witnessed the early Joseon eulpeun city Coat of arms of the famous byeongyeryang (卞 季 Yang) is a cigar.

    Seokdae in this calculation (石台) one, so that the right seokdae manggyeongdae (望京 台) is.
    Manggyeongeun original mangyeong (万 景) called the rise in this place under the eyes mangyeong (万 景) that the place derived the name of the deployment, but now the Joseon Dynasty Yi Seonggye goryeomal past few day have been torn apart changeopdoen clothing Fang of the earth, and truly humble gentleman dressed in straw on the right after one of the Mangyongdae mangyeong manggyeong 2 (望京) I've changed the name to this gentleman right haengsaek shabby considering the Miocene (重臣) a person joyun (?胤) was .

    Joyun (?胤) the house (Lee 集) · woncheonseok (元 天?) · giljae (吉 再) for consideration along with bitnaedeon myeongyu (名儒) Korea as countries aim gongsinin (? 浚) brother is also a pro - .
    Consider the humble servant of the servants was goryeojo Yi Seonggye the seonjukgyo Chixor in the killing, let's now consid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and it was loyalty to the MYUNGSHIN (名臣) but they serve to jiahbi yeolnyeo two, humble servant can serve two wage This is not a happy to Confucianism, the wish to joyun giljae Abnormal and turned against the Yi Seonggye Cheonggyesan be found.

    Jeongdojeon, and aim for Yi Seonggye followed, as well baegeukryeom MYUNGSHIN (名臣) the dumundong (杜 ? 洞) in writing umbrella is gone, replaced on the merits of government by the people cheolsi (撤 市) on, and the person for signs of SIS To be able to find Jay was never enough. Jeongdojeon (? 道 ?) as a last resort to save the past, human resources, and widespread over the past tongmun (通 文) and stared naeteuna statement, the peasant was forced to tax-haven.
    When the invitation was Abnormal. Abnormal in the palace that's why Yi Seonggye himself further to the right of this right to the throne of yeoteuna Abnormal not to forget the New Year'm found, my brother, God (臣 道) and I found the sound to go with never a word, like a retired state trooper , giljae fell in the New Kingdom, Dr. (博士) of the title without beating the ipgwol yangmocha (?母 次) that a note ipsan jeonhago disappeared. Gimjasu (金 自 粹) at the invitation of the car also motyigieo 5·6 Mausoleum (祠堂) as a suicide by taking poison, due mostly to the end of the freeze was Yi Seonggye.

    Finally, we asked joyun the right, but now the name of his Korean joyun gongsin laughing and looking to the right on Lock
    This type (AIM), a shower instead of a brother brother brother ridiculed but instead stuck to yokhamyi keuoedahago yitaejo Hojo gave Yi Seonggye panseo return of the government position was. And the name Yun (胤) to fix gyeoneuro characters (字) and jonggyeon (? 犬) called broken, the country lost wages, and it come like a dog was also shot dead.

    Augustus jojonggyeon (? ? 犬) Gao is back. Please enjoy the movie yeoksin gilyigilyi brother. Joyun brother abandoned the Korean liquor of the deep mountains Guangzhou hemaemyeo not hear the sound of chickens which chatahdanida place where the two highest peaks in ohreuni Cheonggyesan Jung said.
    When calculating the bend to see the autumn leaves was a favorite this season. But even if a good view of the country and lost wages joyun mind travels I've never been pleased to give away songgyeong (松 京) wailing in the rancor exploded affection was forced out. He just lost the country's king to lose his resentment lovely looks back does not die.
    What killed my mothano

    SIS is looking at this cry to sleep on the ground susak (類 朔), which were told by people sympathetic to the grief of joyun Mangyongdae (万 景 台) and manggyeongdae (望京 台) is LA they called.
    Joyun heard on the news for Cheonggyesan Yi Seonggye that their loyalty deeply, and that this loyalty (Lee) Dynasty in dolryeobogi joyun to find himself back on the Wed Cheonggyesan gwonhaeteuna joyun car away and hope SIS but did not see that word.

    The joyun can not bend the minds of our dynasty, the Yi Seonggye yeoksin or realized, that means being armed with a word like that went sseulsseulhi. Less, but the San joyun

    Cottages built by affection, but to avoid rain and dew, joyun not want to see this also leaves the Cheonggyesan liquor (? 州) deep in the mountains had to move your feet.
    Today the cottages manggyeongdae (望京 台) is.

    (『Jeonseolji (? 說 志)』, Gyeonggi-do)

    マックギェドング(幕?洞) 果川ソウル大公園後にある山が??山(??山)だ. ??山の昔の名前はチォングヨングサン(??山)にこの算定でチォングヨング(??)が昇天したと?えたことから生じた名前だ. 山の中に考察(古刹)があるから統一新羅時代創建したと?えるのに, 高麗末期の重臣(重臣)として博?(博?)することにその名前が高かった異色(李穡)がかつてこちらを尋ねて詠じた時と朝鮮初期の文章家で有名な卞季良(卞季良)の現?ある.

    この算定に石台(石台)加えるかあるから, この石台がすぐ望景台(望京台)だ.
    望景は元?晩境(万景)といってこちらに上がれば目の下晩境(万景)が展開されるというのにで由?した名前だったが, 高麗末を?つ李成桂の朝鮮王朝が創業されてからわずかばかりのある日ちぎれちぎれチッオジン衣服にまさにデジパングと草履調えることの見窄らしい士一人がこの晩境台に上がった後では晩境が望景(望京)で名前まで?わったから, この行色の見窄らしい士が正しくきれいにしようと重臣(重臣)の一人であるゾユン(趙胤)だった.

    ゾユン(趙胤)は異執(李集)·源泉席(元天錫)·ギルゼ(吉再) などとともに高麗を輝かした名儒(名儒)で朝鮮開?功臣である照準(趙浚)の親弟(妹)でもある.
    高麗の臣下だった李成桂が高麗組の忠臣チョンモンズをソンズックギョで殺す, 朝鮮王朝を創業すると今まで高麗に忠誠をつくした名臣(名臣)たちは烈女は二つのジアビを仕えない, 忠臣は二人の賃金を仕えないという儒?思想に濡れる, 異色をはじめとしてゾユン^ギルゼドングが李成桂に背を向ける??山を?したのだ.

    李成桂には鄭道?·照準·べ?クックリョムなどがよっただけ名臣(名臣)たちはトゥムンドン(杜門洞)で笠を書く紗羅誌で, ?民は政?の入れ替えに本案して撤市(撤市)をする, 松都には人の跡を?すことができない位にものしずかなこと言い?くせなかった. 鄭道?(鄭道?)が窮余の策として過去を通じて人才を求める事にする?く過去通文(通文)を出したが文科·武科に見つめたことはお上りさんしかいなかった.
    この時異色が招請を受けた. 異色が宮に入ると李成桂は親しくひいては迎え入れたが王座に上がったことを見た異色は?正月を忘れないために?すことであり, 兄さんに信徒(臣道)をつくしに?したのは決していやの外だという一言を?す退く, ギルゼは神さま王朝で下った博士(博士)の??も退ける入燕もないまだ羊毛のため(養母次) 入山するという手紙だけ?えられ消えた. 金自首(金自粹) また 5·6次の招請に負ける祠堂(祠堂)で最後を告げる服毒自殺として李成桂の肝?を冷ややかにさせた.

    最後に呼んだのがすぐゾユンだったが, ゾユンは自分の名前が朝鮮ゴングシンロックに上がったことを報告失笑をしながらこれは兄さん(型)(照準)が一?にする惜しむことがない一?にする?口を言うことがクウェダする異態組に付いた兄さん(型)をゾロングハゴで李成桂が?えた?曹判書の官職を返還した. それからは名前磨き(胤)を犬で直したところで(字)を種犬(?犬)といったから, ?と賃金をイルゴも死ぬことができないから犬のようだハムだった.

    弟操?犬(趙?犬)は退きます. 兄さん(型)は逆臣の映?を長さ長さ享受します.兄さん(型)と朝鮮を捨てたゾユンは洋酒^光州の深い買った迷ってニワトリと犬の音が聞こえない煮こんだ?し回ってからどの高い峰に上がったらこちらがすぐ??算定だった.
    算定で見下ろしたら焚く紅葉が盛んにかかる秋だった. しかしいくら良い景色でも?と賃金を失う迷うゾユンの心を?しくしてくれ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から遠く松京(松京)にしみた丁銀泣き喚きが出るしかなかった. 彼はただ?を失う賃金をイルゴも死ぬことができない自分が恨めしいだけだった.

    私のどうして竹紙モッハノ-

    こんなに松都を眺めながら泣いてから倒れる?るするのをスサック(類朔), これを?えて聞いた人?がゾユンの悲しみに同情して晩境台(万景台)を望景台(望京台)だと呼んだと言う.
    ゾユンが??山に入ったという消息を?えて聞いた李成桂はその忠節に深く感動する, その忠節をこれ(李) 王朝で回して見るために親しく??山でゾユンを?して?って?るのを?車?めたがゾユンは遠く松都を眺めるだけ一言がなかった.

    ここにゾユンの心を曲げ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を悟った李成桂は私たちの王朝には逆臣や, その意味は?漢至高する一言を?す寂しく?った. それでもゾユンを忘れない山

    情に草幕を負う雨と露を避けるようにしたが, ゾユンはこれも見たくないと言って??山を去る洋酒(楊州)の深い山で足を移した.
    この草幕が今日の望景台(望京台)だ.

    (『??だ(??誌)』, 京畿道)

  • 벽상갈화

    벽상갈화

    어버이 봉양하는 효자 최사립
    【사진】어버이 봉양(奉養)하는 효자(孝子) 최사립(崔斯立)

    옛 과천현 막계리(현 막계동)에는 『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된, 효자 최사립(崔斯立)의 무덤과 함께 벽상갈화(壁上葛花)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최결(崔潔)의 아들로서, 지행(志行)이 뛰어나고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준거하였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때는 엄동설한이었는데, 환자가 갈화탕을 몹시 찾았다. 최사립은 벽 앞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러자 돌연 벽상에 갈화가 만발하는게 아닌가. 그는 그 꽃을 따서 정성을 다해 갈화탕을 만들어 아버지께 봉진하였다. 이에 부친의 병환이 쾌유되었으니, 진실로 효성의 지극함에 천지신명이 감동한 까닭일 것이다.
    이 사실이 관에 알려지자 과천현감이 사연을 나라에 보고한 즉, 임금께서 그 효심을 크게 상찬하여 중종 9년에 특별히 참의(參議)벼슬에 추증하고, 또 선조 때는 효정(孝旌)을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천 일대의 엄청난 변화 속에서 최사립의 무덤마저 지난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여 지금은 벽상갈화의 전설만 효행의 예화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Gwacheonhyeon makgyeri old (current makgyedong) the 『samgangrok (三? ?)』 recorded, on paper choesarip (崔 斯 Proof), along with the graves of byeoksanggalhwa (壁上 葛花) comes from a legend of.
    The central vice cheomji (? 知 中? 府 事) a former choegyeol (崔?) as the son of, sub-branch (志行) This excellent gyeonghak (? ?), as well as the bright, especially in the parent consistently mosim 『Elementary (小?) 』were compliant.

    The usual bottle of wine like a guy who got his father thereby. When was the harsh winter, the patient looked very galhwatangeul. Get on your knees and sit neatly in front of a wall choesaripeun desperately wished wishes. Then suddenly byeoksang might just be in full bloom in galhwaga. He made a flower named after my father bongjinhayeotda galhwatangeul sincerely. Now that the father's illness, the Get well, truly as the Hyosung jigeuk sinmyeongyi moved heaven and earth will kkadalil.
    This fact became known that the coffin of Gwacheon hyeongam this story reported in the country that pay you to praise those who's significant especially in chamui Zhongzong 9 (??) chujeung in government position, and when the ancestors hyojeong (孝 旌) and myeonghayeot say is history.

    Gwacheon one of the great changes in the grave choesaripui finish the 1979's concessions to the south as Lee's armband byeoksang now go to chapter hwaui jeonseolman are told to be yehwa of filial piety is the subject.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昔の果川?マックギェリ(現マックギェドング)には 『サムガングロック(三綱?)』に記?された, 親孝行催私立(崔斯立)の墓とともに壁上葛花(壁上葛花)の??が?わる?る.
    彼は僉知中樞府事(僉知中樞府事)を執り行なったツェギョル(崔潔)の息子として, 知行(志行)がすぐれる??(??)に明るかっただけでなく, 特に親が仕えるにおいて?ら 『小?(小?)』に準昨夏だった.

    普段お酒が好きだったお父さんがそれによって病?を得た. 焚く?寒だったが, 患者がガルファタングを大??した. 催私立は壁の前に膝を端整にひざまずく座って切に願いを祈った. すると突然壁上に葛花が?開するのではないか. 彼はその花をいじめで?心をつくしてガルファタングを作るお父さんにボングジンハだった. ここに父親の病患が快癒されたから, ??で孝誠の至極さに天地神明が感動したわけであるでしょう.
    この事?が管に知られると果川?監が事情を?に報告すると, 賃金がその親孝行を大きく上刈して中宗 9年に特別に?議(?議)官職に追贈する, また先祖の時はヒョゾング(孝旌)が命じたと記?するある.

    果川一?のおびただしい?化の中で催私立の墓さえ去る 1979年?仁郡南四面腕章里に弛張して今は壁上葛花の??だけ孝行の例話で?わるあるだけだ.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내시마을 인덕원

    내시마을 인덕원

    인덕원(仁德院)은 조선조부터 내시들이 살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신체적으로는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환관(宦官)이라 하여 궁중의 임금과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신분이라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신분에 어울리게 남에게 자주 어진 덕을 베풀기도 하는 사람들이라 인덕이란 마을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마을에,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인 원(院)을 두게 되어 이로부터 인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원은 임진왜란 전에 폐하여 없어졌다.
    어쨋거나 인덕원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교통의 요지여서, 과천·안양·의왕·군포·성남 등 사통팔달한 오늘의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고 하겠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Indeokwon (仁德 院) from the Joseon Dynasty eunuch is known as the town where they lived. These include the physical momyijiman though eunuchs, eunuchs (宦官) called the king of the court to treat the close identification served was called for high office. The identity was proportionate to others, so often they are the people who have every intention of virtue is benevolence to get the name of the town reached.
    But later on in this town, justice for those who travel to suksoin won (院) is put to be found from which indeokwon call me. His Majesty is gone more than two rounds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Even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anyway indeokwon yeoseo transportation hub, Gwacheon, Seongnam, Anyang, Uiwang, Gunpo, and the phenomenon of fornication 8 dalhan today said this will never happen to ahnimeul silgamke.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仁?院(仁?院)は朝鮮朝から?示たちが住んだ村で知られるある. これらは身?的にはたとえ去勢された身だが, 宦官(宦官)といって宮廷の賃金と身近に?することはできる身分だ高い官職を?任したりした. それでその身分に似合うように他人によく凍るは?を施したりする人?だ人?だ村名前を得るのに至った.
    ところで後にはこの村に, 公務に旅行する人?のための宿所である円(院)を置くようになる今後仁?院と呼ぶようになったと言う. この丸は壬辰の?の前に?して消えた.
    とにかく仁?院は壬辰の?以前からもう交通の要旨のため, 果川·安養·議旺·軍浦·城南など四通八?した今日の現象が決して偶然ではないことを感じさせると言える.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교화당 이야기

    교화당 이야기

    현재의 안양동은 옛 과천현 하서면 안양리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안양 5동 현 안양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옛 마을의 이름이 교화동(敎化洞)이었던 바, 여기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오늘의 엄청난 변화와는 달리 이 마을은 원래는 수리산을 뒤로 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이 동네에 가난한 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외아들마저 글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무엇보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하였다. 비록 끼니는 거를 지라도 틈만 나면 서당을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문자를 익히느라고 귀가시간이 늦곤 하였다. 사정을 알 바 없는 부모는 가난한 집 자식이 그나마 게으름을 피운다고 꾸짖기를 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아들의 학구열에 감복한 서당선생이 그를 불러들여 글을 가르쳤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필경엔 과거시험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글방과 동네가 한덩어리가 되어 잔치를 벌이며 이를 함께 기뻐하였음은 물론이겠다.

    남달리 어렵게 공부한 그는 감격을 안은 채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마을로 내려가 향교를 짓고 무지한 백성들을 두루 가르치고 싶노라고 아뢰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기신 임금은 그의 향리에 커다란 집을 지어 교화당(敎化堂)이라 이름짓고 그 뜻을 펴게 하니 이런 연고로 동네이름마저 교화동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옛날 교화당이 있던 자리에 바로 지금 안양국교가 섰으니 같은 배움의 자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이랄 수가 없다고 믿어진다. 가난 속에서 서럽게 공부한 그의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나 할것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If the current anyangdong Hexi Anyang Rie gwacheonhyeon belongs to the former. Among them, Anyang 5-dong, Anyang Elementary School with a focus on the current name of the old town gyohwadong (敎 化 洞) was a bar, there is one story that has been word of mouth.

    Unlike today's massive changes behind the town Surisan originally was a typical rural village. In this neighborhood, a poor couple had a son to leave. The poor so badly I could not be called the only son geulgongbu finish. But more than anything to learn that his son was great enthusiasm. Even though l can leach per meal, which the characters learn that you were snooping shoulder neutgon curfew was busy. The matter does not give a child the parents are poor, the house was lit up with laziness geunama kkujitgi has a generously.
    Then the son of one teacher per hakguyeol gambokhan the imported article has taught him. He studied hard and pilgyeongen past exam examination was tall. The town is a feast handeongeoriga geulbang and negotiating with them as well as sound yigetda rejoiced.

    Less than thrilled that he studied hard Something inside the King march forward. But the government position in my hometown madahago Hyanggyo building down to the ignorant people to teach sipnorago ahroeeotda duru. The mean wage gasanghi yeogisin a big house built for his hyangri gyohwadang (敎 化 堂) called name, that means building the town pyeoge do you finish this yeongoro detention was calling me to Winter.

    Right now, the party stood for the old rehabilitated Anyang seat of learning, such as relations with seoteuni no coincidence when you think the point I can not believe that morality is. Poor in spirit is still alive, he has studied seoreopge Tarragona freely.

    (『Gunji Chats (始? 郡 志)』, phase (上))

    現在の安養洞は昔の果川?下西面安養里に?する. その中でも安養 5洞現安養小?校を中心にした昔の村の名前が?化洞(?化洞)だったところ, ここには一つの話が口?される?るある.

    今日のおびただしい?化とは違いこの村は元?は修理山を後にした典型的な田舍村だった. この町?に貧しい夫婦が息子一人を置くあったと言う. あんまり貧しい暮しだから一人息子さえ文勉?を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しかし息子は何より?んだところでする熱意がすごかった. たとえ食事は欠かしてもひまさえあれば寺小屋をあっちこっち?いて肩越しに文字を習おうとして?宅時間が?いした. 事情が分かるところない親は貧しい家子がそれさえも怠けたと叱るのをやまなかった.
    そうする中この息子の?究熱に感服した寺小屋先生が彼を呼び入れる文を?えた. 彼は熱心に勉?をして筆耕には過去試?に堂堂と合格した. 文部屋と町?が一かたまりになる宴を着やこれを一?に喜んだのは勿論だろう.

    人?みはずれて難しく勉?した彼は感激を抱いたまま王?これから進んだ. しかし官職を厭う故?村に降りる?校を建てる無知な民たちをあまねく?えると思おうと申し上げた. その意味をよみした賃金は彼の?里に大きな家を建てる?化だ(?化堂)と名付けるその意味をピョなのしたらこんな軟膏で町?名前さえ?化洞で不利優なのなった.

    昔の?化?たりがあった席にすぐ今安養?交が立ったから同じ?問の?るだろうと言う点を思えば決して偶然だ?がないと信じられる. 貧乏の中で悲しく勉?した彼の精神がまだ住んでいるとするでしょう.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매곡동 이야기

    매곡동 이야기

    옛 과천군 상서면 비산리에 해당하는 곳(현 안양시 비산동)에 매곡동(梅谷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가에서 부리는 말을 사육하던 곳이라 하여 마장골이라고 불렀으나 후대에 오면서 매곡동으로 불리우는 한편,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중엽 이 마장골에서 한 아낙네가 갓난아이를 풀밭에 뉘여 둔 채로 김을 매고 있었는데, 돌연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아이를 채어 달아나버렸다. 아이를 잃은 아낙네는 그 날로 몸져 눕고 말았다.

    며칠 후 이 마을의 나뭇군이 산에 갔다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즉, 문제의 그 매가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곧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그가 포졸들을 앞세우고 마을 사람과 함께 현장을 다시 찾아갔을 때는 매도 아이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어디에선가 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후로 마을이름도 매곡동으로 불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If you're sangseo old Gwacheon where the corresponding scattering Rie (Anyang Bisan present) to maegokdong (梅 谷 洞) is a village. The words burst from the Joseon Dynasty bier was 46 goals we've called the Horse came to posterity bulreoteuna maegokdong called on the other hand, is one of the stories are told.

    Goal 1 in the mid Joseon Dynasty Horse ahnakne the grass lay the crock put the baby while I was wearing steam, suddenly came to one big sheet chaeeo children ran away. Ahnakne losing a child was sick that day went to lie down.

    A few days later went to the mountain village of namutgunyi every one of the big circles in the air and saw the sights. That went, looked closer, taking care of the problem was the Hawk Eye. The fact that these people will soon alryeoteuna, he's a policeman on the scene, along with some of the villagers apsewoogo called on again when the sale of children had gone somewhere.

    People in the town where kids grow up I'm sure the pieces are protected believed. Since then, the town's name was starting to temper the maegokdong.

    (『Gunji Chats (始? 郡 志)』, phase (上))

    昔の果川君上西面悚酸里にあたる所(現安養市ビサン洞)にメゴックドング(梅谷洞)という村がある. 朝鮮時代には官家で使う言葉を飼育した所とv言ってマザングゴ-ルだと呼んだが後代に?ながらメゴックドングで不利優は一方, 一つの話が?わるある.

    朝鮮朝中葉このマザングゴ-ルで一上さんが赤ん坊を草地に?かすよ置いたままのりを枚でいたが, 突然大きな?一匹がナルアワで子供をひったくる逃げてしまった. 子供が迷子になった上さんはその日に?こむ?いた.

    何日後この村のナムッグンが山へ行ってから大きな?一匹が球の中でぐるぐると回るある光景を見た. 身近にダががでよく見ると, 問題のその買?子供を面倒を見るあった. 彼はすなわち村人?にこの事?を知らせたが, 彼が捕卒たちを先に立たせる村住む一?に現場をまた尋ねた時は?渡(罵倒)子供もどこかに消えた.

    村人?は子供がどこかに枚の保護を受けながら者といると信じた. その後で村名前もメゴックドングで不利御旨期始めた.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망해암 스님

    망해암 스님

    망해암(望海庵)은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시 안양2동)에 속한다. 안양 시가지는 물론 멀리 서해를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사찰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임금 때 삼남지방에서 조세로 받은 양곡을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한양을 향해 팔미도(八尾島) 근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거칠어졌다. 놀란 뱃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돌연 뱃머리에 스님 한 분이 나타나 말하였다.
    그대들은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을 들으시오그리고는 뱃사람들을 진정시켜 지혜롭게 위기를 넘겼다. 안도의 순간을 맞자 누군가가 물어보았다.

    대사님은 어느 절에 계십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관악산 망해암에 있소이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배들이 한강에 무사히 닿은 뒤 뱃사람 중 몇이 곧 바로 망해암를 찾아갔다. 그러나 생명의 은인인 그 스님은 없고 대신 법당 안에 그 스님의 용모를 꼭 빼어닮은 부처가 하나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부처님의 큰 자비로 살아났음을 깨달은 그들은 이런 사실을 임금께 아뢰었다. 세종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매년 한 섬의 공양미를 이 망해암 불전에 올리도록 분부하였는데, 이 공양미는 그 후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Manghaeam (望 海 庵) If the Gwacheon's Hexi anyangri (Anyang 2-dong, Anyang Prefecture) belongs to. Anyang city, as well as the West Sea at a glance away from here and I can see where he was named. The temple was built to convey Wonhyo Silla.

    When King Sejong the Samnam to tax in the province received several boats loaded with grain, Hanyang towards the Palmiers (八 尾 ?) when suddenly the winds have reached the water was rough. Surprised when a big wave, and they mess it up, a man suddenly appeared off the bow of the monk said.
    You are so do not panic and calmly listen to me people need to calm down a sailor turned a crisis wisely. Someone slammed a moment of relief asked.

    Ambassador, which section do you?

    And the monk replied.

    Gwanaksan is in cancer is to shut down

    And that suddenly disappeared.

    The piece touches on the river boats that some of his sailor went to immediately shut down by cancer. But no, instead of life euninin the monk in the monk's hall-like countenance, and I drew one of Buddha enshrined was discovered. The Buddha's great mercy and realize that they are living nateum ahroeeotda imgeumkke this fact. It considered the King three kinds gasanghi gongyangmi this island every year to raise the Buddhist manghaeam commanded hayeotneunde, four hundred years after the gongyangmi that have been or will continue.

    (『Gunji Chats (始? 郡 志)』, phase (上))

    望海庵 は果川君下西面安養里(現安養市安養2洞)に?する. 安養町竝みはもちろん遠く西海を一目に眺めることはできる所だと言ってこんな名前が付いた. 査察は新羅時代元曉大師が創建したと?える.

    朝鮮世宗賃金の時の三男地方で租?に受けた糧穀を積んだ多くの尺のお腹が漢陽を向けて八尾島(八尾島) 近海に至った時急に風浪が荒れた. 驚く船人たちが右往左往するある時, 突然船首にお坊さん一人が現われる言った.
    君たちはあまり荒てずにじっくりと私の話をドルウシオグリゴは船人たちを?める賢く危機を越した. 安心の瞬間を迎えると誰かがムルオボアッダ.

    せりふ?はどのお寺にいらっしゃいますか?

    するとそのお坊さんが答えた.

    冠岳山望海庵にあるのだハゴは忽然と消える捨てた.

    お腹たちが漢江に無事に?れた後船人の中で何がすなわちすぐマングヘアムルル尋ねた. しかし生命の恩人であるそのお坊さんはいない代わりに法堂の中にそのお坊さんの顔つきを必ずペオダムは部?が一人仕えたんですあることを見つけた. ここに??の大きい慈悲で生き返えたことを悟った彼らはこんな事?を賃金に申し上げた. 世宗賃金はこれをよみする?年一島の供養米をこの望海庵?典にあげるように言いつけたが, この供養米はその後 4百余年間も?いたと言う.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망령골

    말령골

    옛 과천군 상서면(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속하는 곳으로 과천의 갈현동 찬우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에 망령골(亡靈谷)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초엽 어떤 젊은 사내가 나무를 팔러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를 지나게 되었는데, 웬 소복단장한 예쁜 여인이 나타나 교태를 부리며 그를 꾀었다고 한다. 젊은 사내는 넋이 빠진 채 여인에게 이끌려 가서 하룻밤의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는 별 탈없이 곱게 헤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년 뒤였다. 망령골을 지나는데, 또 그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관악산 모처의 바위 틈으로 가 보라고 이르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사내는 여인이 일러준 곳으로 가 보았다. 놀랍게도 그 곳에는 갓난아이 하나가 울고 있지 않는가. 사내가 데려다 정성껏 기른 그 아이는 훗날 나라의 큰 재목이 되었다. 일설에는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고 한다.
    어쨋거나 망령이 나타났던 골짜기라고 하여 그 뒤부터 망령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If you're sangseo old Gwacheon (Gwanyang-dong Anyang Prefecture) belongs to Gwacheon where the water beyond the head of galhyeondong chanwoo around mangryeonggol (亡 靈 谷) is said.

    According to legend, a young man considering the early part of the chapter went to sell the trees on the way back past the head was, what a beautiful woman appears sobok armed only fuels the coquetry is kkoeeotdago him. A young man brought the soul to a woman went missing while on a night signed the bond. And the Stars in smooth water finely separated.

    Dwiyeotda one years later, however. The specter of goals or did, the woman appeared again. And somewhere in the speaking Gwanaksan a look through the cracks in the rock is reached suddenly disappeared.

    The house where the woman saw ilreojun. Surprisingly, one of the goteneun baby does not cry. The child is raised by a man, take utmost later became the country's largest timber. In some accounts he was a child that is the general ganggamchan.
    In any case the specter that appeared ever since the valley's name comes from the specter goals would convey Iran.

    (『Gunji Chats (始? 郡 志)』, phase (上))

    昔の果川君上西面(現安養市東安?カンヤン洞)に?する所で果川の葛硯洞チァンウムルに移る峠周?にマングリョングゴ-ル(亡?谷)があったと言う.

    ??によれば高麗草葉どんな若い男が木を?りに章へ行ってから?って?る途中にこの峠を通るようになったが, ある素服?長したきれいな女人が現われる嬌態を使って彼を誘ったと言う. 若い男は魂が?けたまま女人に導かれる行ってひと晩の?を結んだ. それからはこれという差し支えなくきれいに別れた.

    ところでそれから一年後だった. マングリョングゴ-ルを?つのに, またその女人が現われた. それからは言うのを冠岳山某所の岩振ることで行って見るイルゴは忽然と消える捨てた.

    男は女人が?えてあげた所で行って見た. 驚くべきことにその所には赤ん坊一人が泣くないか. 男が連れた丹念に育てたその子供は後日?の大きい材木になった. 一?にはその子供がまさに姜宛??軍だったと言う.
    とにかくもうろくが現われた谷間と言ってその後からマングリョングゴ-ルだ名前が付いたと?える.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안양리 찬우물

    안양리 찬우믈

    안양시에 편입되기 전 안양읍 안양리는 조선 말기까지도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현 안양5동)였는데, 여기에도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찬우물 못지않게 물맛이나 전설로 유명한 또 하나의 찬우물이 있다.

    이 찬우물은 수리산 줄기에 위치한 많은 우물 중에도 그 수질이 매우 좋고 수량이 끊이지 않고 일정한 것이 천혜의 특징이다. 수리산 지형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세로 찬우물은 그 가슴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니 그 샘물이 마르지 않음은 호랑이의 젖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 몹시 가난한 부부가 살았는데, 생업이라고는 산등성이의 몇 뙈기 밭과 다랭이논 몇 두락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인 연고인지 여러 해째 가뭄이 들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이 부부는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끼니는 고사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기조차 힘겹게 된 상황이었다.

    생각다 못한 이 부부는 마지막 남은 곡식을 털어 음식을 마련하고 수리산정에 올라 며칠 밤낮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잠시 깜박 졸았던가 싶었는데, 꿈속에 수리산 산신령이 나타나 하는 말이,

    그대들의 정성이 갸륵하여 물을 주겠노라. 지금 당장 내려가서 그대의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들은 부부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분부대로 하였다. 과연 그 가뭄속에서도 엄청난 양의 물이 펑펑 솟아나지 않는가. 부부는 다시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 정성을 다하여 이 우물을 관리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오래지 않아 근동에 이름난 알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름에도 우물 주변에 얼음이 얼 정도로 몹시 차고 마르는 법이 없어 지금도 안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우물이다.

    (『시흥군지(始興郡誌)』, 상(上))

    I happen to be incorporated in Anyang, Anyang, Korea anyangeup Gwacheon's end, even if by not anyangri (current Anyang 5-dong), which was still here now in Gwacheon galhyeondong chanwoomul Oh, that and no less famous for the legend is another chanwoo water.

    This stems in large chanwoo Surisan water wells while the water quality is very good and blessed a certain quantity is a characteristic of never ending. Surisan the tiger lying terrain, the water situation chanwoo as part of the chest that says to do it this spring because of wet or maybe even a tiger's milk is.

    According to legend, in the very distant past couple lived a poor, mountainous Certainly a couple of walks a few durakyi daraengyinon ttwaegi Farmland and was all. But the ointment is a word heard several haejjae drought. You went to the farm looking up toward heaven, the couple was not only yimanjeo. Chogeunmokpi meals apart from the living situation, as was painfully hagijocha.

    The couple did not saenggakda last maryeon food grain fin and repair up to the summit a couple of days and nights and prayed desperately. Then we started dozed off a moment I forgot I wanted my dreams to appear on the right Surisan sansinryeong,

    You have the sincerity gyareukhayeo Nora'll ask. Now you go find a place in the highest fields and go well padorok

    The couple said they had it done that way down the mountain. Whether the drought, despite enormous amounts of water not play well with pop. The couple back to his knees to thank the spirit that gave you the sincerity with all our might was well managed. Since then, no matter how the water without worrying about the drought for farmers was not long before you let albuja has become famous in the Near East is.

    Even in summer the ice frozen around well enough to dry the law's still very cold in Anyang is the most well known and loved.

    (『Gunji Chats (始? 郡 志)』, phase (上))

    安養市に編入される前安養邑安養里は朝鮮末期までも果川君下西面安養里(現安養5洞)だったが, ここにも今の果川市葛硯洞にあるチァンウムル劣らずムルマッや??で有名なまた一つのチァンウムルがある.

    このチァンウムルは修理山脈に位した多くの井の中にもその水質が非常に良い?量が絶えない一定するのが天?の特?だ. 修理山地形は虎が?になるある形勢でチァンウムルはその胸部分に?たると言ったらその泉水が乾かないことは虎の乳腺だからかも知れない.

    ??によれば, ?かな昔に大?貧しい夫婦が住んだが, 生業とは尾根の何枚畑とダレングイノン何斗落が全部だった. ところで語である軟膏なのか多くのヘチェ日照りが入った. 空だけ眺める耕作するこの夫婦は苦楚が竝大抵ではなかった. 食事はさしおいて草根木皮で食いつなぐことさえ手に負えなくなった?況だった.

    セングガックダできなかったこの夫婦は最後の?った穀食をはたく食べ物を用意する修理算定に上がって何日日夜を切に祈った. そうしてしばらくぴかり居眠ったのかたかったが, 夢の中に修理山山神?が現われる言うことが,

    君たちの?心が殊勝で水をくれる. 今すぐネリョがで君の田畑の中一番高い煮こんだ?して井をほるようにしなさい

    この言葉を聞いた夫婦はその道で買った下る言付けどおりした. 果してその日照りの中でもおびただしい良?水がこんこんと湧き出ないか. 夫婦はまたひざまずく神??に感謝のことを申し上げた後?心をつくしてこの井を管理した. その後ではいくら日照りがドルオも水心配なしに農業をするようになる久しくなくて近東に有名なアルブザになったと言う.

    夏にも井周?に氷が精神位に大?ガレ?ジ乾き方がない今も安養では一番多く知られる愛される井だ.

    (『始興君誌(始興郡誌)』, 上(上))

  • 남태령 고개

    남태령 고개

    남태령 고개

    서울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승방평(僧房坪)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6㎞ 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南泰嶺)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또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여 묘소로 가시던 길이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위 산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에 의해 돌아가실 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魯, 1702~1766)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묘소이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께선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놓인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程)을 택하여 다니게 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고 한다.

    정조(正祖)께서 과천에서 쉬어 가실 때, 과천의 옛 고을 이름을 따서 이 곳 아헌(衙軒)인 동헌에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 고요하고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라 명명(命名)하고 친히 현판을 썼으니(정조 14년(1790) 2월 11일), 지금까지도 그 현판이 남아 있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南泰嶺)에 얽힌 사연이 있다. 남태령에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관악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였다 하여, 여우고개〔狐峴〕라 불러 오고 있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원에 행차하실 때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시고 잠시 쉬어가게 되자 한 촌로(村老)에게 넌지시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나이다

    하고 즉석에서 고개의 이름을 고치어 아뢰었던 것이다.
    정조께서는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임을 이미 듣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는 일찍이 고려조의 공신(功臣)이요,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는 강감찬(姜邯贊)이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여 크게 꾸짖어 호령하기를,
    네 여우들이 다시 이 고개에 근접을 하는 날이면, 너의 족속은 모두 멸종할 줄 알아라 하고 한 소리가 있은 후로 다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들었기도 하였는지라, 효심도 극진하지만 인자(仁慈)하기로 유명한 정조께서도 그 괘씸
    함을 참지 못하시고,

    너 어찌 거짓 이름을 대었느냐? 그 죄 죽어도 마땅할 지니라
    하며 크게 꾸짖으시었다.

    촌로는 엎드려 죄를 기다리는데, 정조께선 촌로에게 거짓 이름을 댄 사유를 또 다시 묻자, 촌로는 죽을 때가 되느라고 그랬사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거짓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여우고개이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쌍스러운 이름을 입바르게 알려올림이 황송하옵기로, 생각나는 대로 알렸사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남태령이라 했는고 하고 정조께서 물으니

    다름이 아니오라. 이 고개가 서울서 남쪽으로 오면서 맨 처음 있는 큰 고개이옵기로 그리 아뢰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조께선 촌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잠시 가졌던 노여움을 풀고,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셨는데, 그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일족이 아직도 남태령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남태령과 정조
    【사진】남태령(南泰嶺)과 정조(正祖),(곽영민)

    Seoulseo river crossing, the ferry reached Noryangjin again heukseokdong (黑石 洞) wearing the Han River through the looking dongjakdong (? 雀 洞) yisugyo (梨 水 ?) back in the mail, seungbangpyeong (僧房 坪) Seokguram reaches. Maybe go back to the south, where 6 ㎞ comes with a big head. The head immediately namtaeryeong (南泰 嶺) is. Gwacheon, formerly the head (果 川) through the Suwon (水 原) Kodo was going on. Also Samnam (三 南) was the length of their senses, once a virtue King (正 祖 大王) from the Hyosung jigeukhan miss him in the grave was gasideon length. Go a little further south past the Gwacheon Oh, that you let the good virtue (加 ?) as yours (堂上) government position that the divisor (除 授) did well, and one of the top mountain myoga, which has the virtue seson (世?) when the father, who as Crown Prince Sado (思 悼 世子) that was working when my grandfather died by the gimsang (金 尙 ?, 1702~1766) brother of jwauijeong (左 ?政) gimyakro (金 若 ?, 1694~1753) is a grave. All piled up like a tomb equipped gokdameul jeongseung myoyeotjiman, chastity kkeseon past the passing of the father's bittersweet, she remembers that it placed next to the road to the cemetery can not bear the debt was passed to cover your face. After that in Anyang manangyo (万 安?) a new place, new leg (路程) choosing to be around, as it was in these condensed milk. Chastity (正 祖) when you go relax in Gwacheon, Gwacheon This place is named after the old town Ahern (衙 ?) is a dongheon burimheon (富 Lim ?), IAB (? 舍) is a calm and relaxed and ononsa (?? 舍) LA naming (命名) tablets for himself, and he mixed his (original father 14 years (1790) 2 11), the tablets still remain. Namtaeryeong the junction between Seoul and Gyeonggi Province (南泰 嶺) are Explained. Namtaeryeong the thick trees and secluded place with a lot Gwanaksan was haunted by a lot of cross fox, fox head 狐 ? 〔〕 LA call was coming. One day the Great virtue of Crown Prince Sado neungwon Suwon to enshrined in a volcano when you pull up in your head namtaeryeong eoga (御?) became a one stop shop chonro sigo a break (村 老) Pass the name of a throwaway muleuni, Namtaeryeong (南泰 嶺) called haopnayida Pass on the fly and will be the name of the gochieo ahroeeotdeon. Pass the name of chastity YOU IN THIS Foxes Play Pass is also already were in the ryeoniwa other hand, in early goryeojo gongsin (功臣)'m and famous (名?), known as ganggamchan (姜 邯 ?) 22 head of passing and playing the fox too severe to largely dictate the lecture, Again close to the head of four foxes that day, then all of your kind, and as facing a shame that one could hear it again ever since I heard the tales of the fox did not pray hayeot neunjira, hospitable, but who's also the argument (仁慈) to equally well-known virtue that gwaessim I can not resist hameul sour, What Have You daeeot false name? The crime shall deserve to die Sieotda and scold. Chonro the ground waiting for sins, chastity chonro kkeseon a false name and again asked the reason for Dan, he did chonro Excuse gonna work to die. How dare you lie to one sanggammamakke ahroegoja ahniopgo, the head of the Wu original Fox Hill, in the heart of His Majesty the King asks that you let ipbareuge name ssangseureoun Olympique thy Majesty decided that, as it is you think daphayeotda alryeotsaopnida. This is why chastity namtaeryeong called haetneungo you muleuni Ori no difference. This came to head south of the seoulseo first ahroeeot a big head so I decided this is 옵 He asked. Hear from the description of chastity kkeseon chonro naseoneun had a moment of anger, relax, rather chonro gasanghi not considered (周知) What do government position has given, then the head namtaeryeong include (南泰 嶺) will be called to call hayeotdaneun. I lived in Gwacheon byeonssi the chonro (? 氏) LA jimyeo him, byeonssi (? 氏) clan is still living in the vicinity of namtaeryeong

    ソウルで漢江を向こう, 鷺梁津渡り場に至る, また?石洞(?石洞)を?つ川?をはめる漢江を眺めながら銅雀洞(銅雀洞) 履修校(梨水橋)を郵便に?れば, スングバングピョング(僧房坪) 石窟庵に至る. ここでまた南に 6㎞ くらい?面大きい峠が出る. この峠がすぐ南泰嶺(南泰嶺)だ. この峠はこの前に果川(果川)を?る水原(水原)に行った昔通った道だった. また三男(三南)で通じた道だ, ひとときは正祖大王(正祖大王)が至極な孝誠でお父さんをしのんで墓所にいらっしゃった道だった. 果川をジナで南にもうちょっと?面ムルマッが良くて情調が行こう(加資)で?上(堂上)官職を除?(除授)したという井がある, その上の山には畝が一つあるのに, これは情調が世孫(世孫)でいる時お父さんである使徒王世子(思悼世子)がお爺さんによって?る時協力したという金相老(金?魯, 1702~1766)の兄さん(型)である左議政(左議政) 金?路(金若魯, 1694~1753)の墓所だ. ゴックダムを積んでゾングスングミョらしく皆ガッツオジン畝だったが, 情調は先日のお父さんの哀切さを思って?つ道のそばに置かれたその墓所さえ見たくない?扇で顔を覆う過ぎ去ったというのだ. その後安養に?岸校(万安橋)を新たにおく, 新しい路程(路程)を選んで通うようになったことがこのようなヨンユエソだったと言う. 情調(正祖)が果川で休んで行く時, 果川の昔の村名前をいじめでこちら??(衙軒)である東軒にブリムホン(富林軒(, ?査(?舍)を?かだ?だと言ってオンオンサ(??舍)だと命名(命名)と親しく懸板を使ったから(情調 14年(1790) 2月 11日), 今までもその懸板が?っている. ソウルと京畿道の境界である南泰嶺(南泰嶺)にオックヒン事情がある. 南泰嶺に樹木が鬱蒼だ?まる所が多くて冠岳山を出入りする狐がたくさん出沒こんにちはだったして, 狐峠〔狐〓〕だと呼んで?るあった. 一日は正祖大王が水原火山に仕えた使徒王世子の陵園にお出ましなさる時南泰嶺峠で御け(御駕)を止めるしばらく休んで行くようになると一村老(村老)にそれとなく峠の名前を問ったら, 南泰嶺(南泰嶺)というのです する?席で峠の名前を直す申し上げたのだ. 情調はこの峠の名前が狐峠なのをもう聞いたりしたが, 一方ではかつて高麗組の功臣(功臣)であり, 名?(名?)と知られるある姜宛?(姜邯?)がこの頭を通り過ぎている途中狐たちのいたずらがひどすぎて大きく叱る?令するのを, 君の狐たちがまたこの峠に近接をする日なら, お前の族?は皆絶滅することができなさいする一音がある後で二度と狐が現われなかったという??を聞いたりもハヨッヌンジだと, 親孝行も手厚いが因子(仁慈)ならないことで有名な情調もその不?きさを堪えることができない, お前どうして?り名前を言ったか? その罪ズックオも?然だろうしながら大きく叱った. 村老は伏せる罪を待つのに, 情調は村老に?り名前を言う事由を再び問うと, 村老は死ぬ時になろうとしてグレッサオブニだ. 象眼ママに敢えて?り申し上げたところでしたのではない, この峠は元?狐峠イオや, 象眼が問うにそんな下品な名前を言うことが正しくアルリョオルリムが恐縮なのに, 思い出し次第にアルリョッサオブニだと返事した. それではどんな理由で南泰嶺だヘッヌンゴする情調が問ったら さて. この峠がソウルで南に五ながら最初ある大きい峠なのにあまりアルェオッナだと答えた. 情調は村老から?明を聞く出るしばらく持った怒りを解く, 村老をむしろよみする主旨(周知)と言う(のは)官職を下げたが, その後ではこの峠を南泰嶺(南泰嶺)と呼ぶようにしたというのだ. その村老は果川に住んだビョン氏(?氏)だと?わって, ビョン氏(?氏) 一族がまだ南泰嶺近所に住むあると言う

  • 사육신묘와 매월당

    사육신묘와 매월당

    한강 기슭에 있는 사육신 묘소는, 지금은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동작구 노량진)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하북면에 속한 곳이었다.

    이 곳에는 조선조 7대 세조(世祖) 2년(1456)에, 상왕인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참혹한 국문(鞠問)을 받은 끝에 처형당한 여섯 충신-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응부(兪應浮),유성원(柳誠源)의 시신을 거두어 모신 자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희대의 기인(奇人)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金時習)이 등장한다.
    매월당은 조선조 6대 단종 때의 학자요, 충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태어난 지 칠일 만에 글뜻을 알아 일찍이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다섯 살 때 임금 세종이 불러 삼각산이란 제목을 주며 글을 짓게 했더니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삼각산 높은 봉이 하늘을 뚫었고야 三角高峯貫太淸(삼각고봉관태청)
    올라가 북두성을 따 보리라 登臨可摘北斗星(등림가적북두성)
    꾀뿌리에 일어남이 구름과 안개 뿐이랴 非徒嶽出興雲霧(비도악출흥운무)
    능히 왕도를 만세토록 편안케 하리 能使王都萬歲寧(능사왕도만세령)
    세종이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상으로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며 또 한번 그의 슬기를 시험해 볼 양으로,

    네가 능히 가져갈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린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비단을 풀어 끝과 끝을 이어매어 허리에 걸치고는 어렵지 않게 끌고 갔다. 세종이 다시금 경탄하였음은 물론이고, 이로 하여 그의 명성이 일국을 뒤흔들었다.
    그가 삼각사나 중흥사(重興寺)에 들어가 공부를 하던 중 단종의 퇴위 소식을 들은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그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나서 사흘을 통곡하다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또한 소문을 들으니 새남터 형장(지금의 용산역과 한강철교 사이에 위치)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고 처형된 사육신의 시신이 갈가리 찢긴 채로 버려진 채 아무도 수습하려 감히 나서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비탄에 잠겨 있던 매월당은 이 소식을 듣고는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하러 나섰다. 밤중에 중 몇 사람과 함께 형장을 찾아 만고 충절의 여섯 충신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하여 지금의 그 자리에 모셨던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그 후에도 벼슬에는 뜻이 없고 내내 비분강개한 세월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지 삼년 만에 관을 열어본 즉 그의 얼굴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빼어난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세월을 잘못 만난 매월당의 쓸쓸한 생애를 후세 사람들은 길이 애석해 하면서 노량진 기슭의 사육신묘를 지켜보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는 문장과 필법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지리(地理)와 의약(醫藥)음양술수(陰陽術手)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거니와,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한국문학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전설(韓國의 傳說)』, 한국문화도서)

    Sayuksin graveyard on the shores of the river, now Seoul Inverse SAR (Dongjak Noryangjin) belongs to, but if you belong to the Joseon Dynasty in Hebei gwacheonhyeon was different.

    This houses a 7 Sejo of the Joseon Dynasty (世祖) 2 years (1456), the sangwangin discontinued (端 宗) reinstatement of the plot was discovered before the disastrous Bring Korean (鞠 ?) was executed after receiving six loyalists - Horneck Castle (成三 ?), Pak Paengnyeon (朴 彭 年) hawiji (河 ? 地), 2 (Lee ?), Yu Eung-bu (兪 ? 浮), Yu Seong-won (Ryu ? 源) position of the body is enshrined enjoyed.

    But here's caused by the huidae (奇人) and the exceptional sentence was gimsiseup per month (梅 月 堂 金 ? ?) have appeared.
    Gustav discontinued when the Joseon Dynasty 6 per month, was one of the loyalists as saengyuksin. Was born in 71 out geultteuteul name, energized by early prodigy. When he was five, the king called King Sejong gives Triangle Mountain article titled let fly when I told a number of eulpeotda.

    Triangle Mountain High bongyi pierced the sky Goya 三角 高峰 ? 太 淸(Samgakgobonggwantaecheong)
    North Star'm gonna get up ta availability 登 臨 可 摘 北斗星(Deungrimgajeokbukduseong)
    Clouds and fog up no kkoeppurie ppunyirya 非徒 岳 出 ? 云?(Department of rain Evil Dude fog)
    Hail to the king aptly Hari torok pyeonanke 能使 王 都 万? 寧(Neungsawangdomanseryeong)
    The report largely praised King Sejong article 50 to fill over the silk, and another sergeant to test the amount of his wisdom,

    Aptly, you could take that?
    Is asked.
    And do not hesitate a bit young gimsiseup silk tie at the waist after wearing go end to end and took a hard stop. King Sejong admire hayeoteumeun course again, and this, his reputation and rattled a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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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江岸にある死六臣墓所は, 今は行政?域上ソウル特別市(銅雀?鷺梁津)に?するが, 朝鮮時代には果川?下北面に?した所だった.

    こちらには朝鮮朝 7台世祖(世祖) 2年(1456)に, サングワングである端宗(端宗)の復位をはかって巨事直前にばれる血なまぐさい?文(鞠問)を受けたあげく?刑された六忠臣-成三問(成三問),朴彭年(朴彭年),河緯地(河緯地),李ヶ(李〓),兪?孚(兪?浮),油性院(柳誠源)の死?をおさめる仕えた席がある.

    ところでここには希代の起因(奇人)と同時にすぐれた文章家だった結ぶんだキムシスッブ(梅月堂金時習)が登場する.
    ?月?たりは朝鮮朝 6台端宗の時の?者です, 忠臣で生六臣の一人だった. 生まれてから塗りであるぶりにグルトッが分かってかつて神童で名前をはせた. 彼が五?の時賃金世宗が呼ぶ三角山と言う題目を?えて文を作るようにしたら?席で市一?を詠じた.

    三角山高い棒が空をトルオッゴなの 三角高峯貫太?(サムガックゴボンググァンテチォング)
    上がる北斗星を取る見よう 登臨可摘北斗星 (ドングリムがゾックブックドソング)
    クェプリに起きることが雲と霧ばかりか 非徒嶽出興雲霧 (ビドアックツルフングウンム)
    充分に王道を万?するように?にさせようぞ 能使王都万?寧 (能王道だけセリョン)
    世宗が文を見て大きく?めて上に?に五十ピ?ルを下賜してもう一度彼の知?を試して見る羊で,

    君が充分に持って行くことはできるのか?
    する問った.
    するとオリンキムシスッブは少しもためらわない絹を解く終りと終りをイオメオ腰にガ?ルとしては難しくないように連れて行った. 世宗が今一度驚歎したのは勿論だ, これにして彼の名?が一?を搖るがした.
    彼が三角社や中興社(重興寺)に入って行く勉?をする中端宗の退位消息を聞いたことが二十一?の時だった. 彼は?んだ本を皆燃やす出る三日を泣きわめいている途中?を刈るお坊さんになった.

    またうわさを聞くからセナムト刑場(今の?山?と漢江?橋の間に位置)で血なまぐさい刑罰を受ける?刑された死六臣の死?がずたずた引き破かれたまま捨てられたまま誰も?まろうと敢えて出る人がないと言った. 悲嘆に掛かるあった?月?たりはこの消息をドッゴは死を?悟する死?を?まりに出た. 夜中に中何人というに刑場を尋ねて万苦忠節の六忠臣の死?を丹念に?まって今のその席に仕えたのだ.

    結ぶんだキムシスッブはその後にも官職には意味がない始終悲憤慷慨した立てた過ごしてから後には忠?道洪山(鴻山)の無量寺(無量寺)から死んだ. 彼が死んでから三年ぶりに煮こんだヨルオボンすなわち彼の顔が現つと少しも違うことがなかったと言う.
    ずば?けた才を生れついたにも立てた過ち?った?月?たりの寂しい生涯を後世人?は道が悲しくて惜しがりながら鷺梁津岸の飼育神妙を見守る心は昔も今も?わりがない.

    彼は文章と筆法で名前が高かっただけでなく, 天文(天文)^地理(地理)と??(??)陰陽術?(陰陽術手)に至るまであまねく通じるけれども, 特に我が?の最初の古典小?の 『クムオ神話(金鰲新話)』は韓?文?史の貴重な資産に評?されるある.

    (『韓?の??(韓?の ??)』, 韓?文化島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