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자료박물관> 과천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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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시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으로 '가루개[葛峴]'라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양시의 관양동(冠陽洞)과 접해 있다.
'가루개'라는 고개 밑 마을이어서 그 이름 역시 '가루개' 또는 '갈고개'인데, '갈현(葛峴)'이란 이름은 이 토박이 땅이름을 바탕으로 한다.
'고개'라는 말은 그 앞의 어느 음절이 있을 때 곧잘 '오개' 또는 '개'로 발음이 변하는 수가 많다. 예를 들어 서울의 '배고개'가 '배오개'(종로4가와 인의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변한 것이라든지【주】20) '애고개'가 '애오개'(마포구 아현동)로 변한 것【주】21) 등이 그 예이다. 이 곳의 '갈고개'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으로 '가루개'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갈고개 > 갈오개 > 가로개 > 가루개
여기서의 '갈'은 '갈림(分 · 支)'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관악산과 청계산을 잇는 지맥에 의해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흐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곳에 칡나무가 많아 이 이름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갈현동(葛峴洞)은 본래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루개'와 그 근처의 '가일(加日)' · '찬우물[冷井]' · '벌말' · '제비울' · '옥탑골[玉塔谷]' · '자경골[自耕]'을 합해 갈현리(葛峴里)라 해서 시흥군 과천면에 편입했다가 과천이 시(市)가 되면서 갈현동(葛峴洞)이 되었다.
갈현동(葛峴洞)과 막계동(莫溪洞) 사이에 있는 곳으로 북서쪽은 관악산, 남동쪽은 청계산을 끼고 있는 아늑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과천군 군내면 지역인데, 1914년에 이 곳의 '향교말[校洞]' · '다락터[樓基]' · '홍촌말[洪村]' · '새술막[外店]' · '구리안[九里內]' · '배랭이(別陽)'등을 병합하여 과천 문묘(향교)가 있어서 문원리(文原里)라 해서 시흥군 과천면에 편입하였는데, 과천이 시가 된 후에 문원동(文原洞)과 중앙동 · 별양동으로 분리되었다.
향교말 뒤쪽에 시흥향교(始興鄕校: 果川鄕校)가 있는데, 관악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그 옆으로 나 있다. 향교 외에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연주대(戀主臺) · 연주암(戀主庵) · 말바위[龍馬岩] 등이 행정구역상으로는 모두 이 문원동(文原洞)에서 분리된 중앙동에 속한다.
본래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옛날부터 과천관아의 문이 있어서 '관문골[官門洞]'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나 관아가 있는 마을이거나 있던 마을이 대개 '읍내(邑內)'로 불리듯이 이 곳도 그렇게 불려 왔다.
'읍내'라고 불리던 이 곳은 근처의 '점말[內店]'이란 마을과 합해 1914년 관문리(官門里)가 되어 시흥군 과천면에 들어가게 되고 그 면(面)소재지가 된다.
1982년에 경기도 과천지구출장소 북부지소【주】22)의 관할이었던 이 곳은 1986년 과천이 시가 되면서 관문동(官門洞)이 되었다.
현재는 행정동인 중앙동에 속한 이 곳은 과천이 군(郡)이었을 때는 군수가, 현(縣)이었을 때는 현감이 상주했던 곳이다.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
"서울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옛날 과천현감 중에는 이 읍내를 지나는 길손들에게 남태령을 무사히 넘을 수 있게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돈을 받아내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속담이 나올 만큼 과천현감이 두려웠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권세를 부릴 때 이렇게 빈정대는 말까지 있었다.
"지가 뭐 과천현감이나 되나?"
과천현감도 무조건 그 통과세를 받을 수는 없었던지 관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말을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느니 하는 구실을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까지 데려와 귀찮게 들볶으며 돈을 내놓도록 했다고 한다.
아전들은 심지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잡아 문세를 물렸다. 이 문세 수탈로 인해서 길손들은 서울 문턱인 이 과천 읍내에서 적지 않은 돈을 털렸다.
한양의 남쪽 관문 구실을 했던 과천은 삼남(전라 · 충청 · 경상도)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오거나 서울에서 내려가거나 할 때 당연히 거치게 되어 있는 중요 길목이었다.【주】23)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역시 과천 땅을 지난 것으로 되어 있다.
" …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 남태령 · 과천 · 인덕원 중화【주】24)하고, 갈미 · 사근내 · 군포내 ·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 "『춘향전』(고본)【주】25)
이처럼 과천은 옛날 교통의 요지였고, 그 과천 안에서도 관문리가 그 중심 마을이었다.
이 곳은 남태령 밑 즉, 옛날의 과천면 하리(下里) 일대와 우면산(牛眠山) 밑의 주암리(注岩里)를 합해 새로운 행정동을 만들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하리 일대도 본래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이다. 1914년 '뒷골[後洞]' · '하락골' · '안골[內谷]' · '한내[寒溪 · 寒內村 · 寒內川]' · '삼거리[三巨里]' · '선바위[立岩 · 禪岩]' · '광창(光昌)'을 병합하여 남태령 아래쪽 마을이란 뜻의 하리(下里)란 이름을 붙여 시흥군 과천면에 편입하였는데, 과천이 시로 승격하면서 과천동(果川洞)으로 개칭되었다.
옛날 길손들이 과천 읍내를 거쳐 이 곳에 이르러 남태령을 넘어 동재기나루[銅雀津]쪽으로 갈 것이냐, 말죽거리를 거쳐 두뭇개나루[豆毛浦 · 豆尾津]쪽으로 갈 것이냐 망서리던 세 갈래 길이 이 곳에 있다.
옛날 '맥계'라고도 불리던 마을이 있는데, 이 이름은 한자식 이름 '막계(莫溪)'가 변한 것이다.
막계 > 맥계(맥개)
'막계(莫溪)'라는 이름은 원래 이 곳에 흐르는 내가 맑아 '맑은내'로 불리던 것이 '맑내' · '막내'가 되고, 그것을 한자로 취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의 '청계산(淸溪山)'이란 산이름도 이 '맑은내'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맑내(맑은내)'는 한자식 이름으로 '청계(淸溪)'라고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긍이 간다. '맑내'는 청계산의 청계사(淸溪寺) 근처 절고개[寺峴]에 그 물뿌리를 두고 북서쪽으로 흘러 남태령 밑 한내[寒溪] 마을에 이르러 양재천(良材川)에 합하는데, 지금은 이 물이 흐르는 청계산 깊은 골짜기를 막아 과천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 일대도 본래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맑내[莫溪]'마을 근처의 '갱맹이[光明]' · '산골말' · '능안말[陵內]' · '벌말[坪村]'을 병합하여 '맑내'의 이름을 따 막계리(莫溪里)라 해서 시흥군 과천면에 편입되었는데, 과천이 시(市)가 될 때 막계동(莫溪洞)이 되었다.
이 곳 과천저수지 안쪽엔 1984년 준공된 과천 서울대공원, 그 옆으로는 1989년 완공한 과천경마장이 있다.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문원리(文原里) 일부를 갈라서 별양동(別陽洞)이라 했다.
문원동(文原洞) 새술막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 토박이 땅이름으로 '배랭이(배래이)'였는데, 그것의 한자식 지명이 '별양(別陽)'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동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정문형 묘갈에는 별왕리(別旺里)로, 그리고 심우준 묘갈에는 별왕촌(別王村)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별양(別陽)'을 한자의 뜻 그대로 풀어 '특별히 양지바른 곳'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이 곳은 청계산의 낮은 산자락이 삼태기처럼 싸돈 골짜기 안으로 햇빛이 많이 들지 않아 '양지(陽地)'의 의미로 땅이름이 붙여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 차라리 '양지'의 의미가 들어가야 한다면 마을이 남동쪽을 향하고 있는 그 건너쪽인 중앙동의 '향교말'이나 '홍촌말'이 적절할 것이다.
'배랭이'는 '비탈'의 뜻인 '별(밸)'에 접미사 '-앙이'가 붙어 이루어진 이름인 듯하다.【주】26)
별(밸)+앙이=별양이(밸앙이)
벼랑이 > 배랑이 > 배랭이
지금의 말의 '비탈' · '비알'이란 말은 원래 '비탈진 곳'이란 뜻의 옛말인 '빌'을 그 뿌리로 한다.
빌(빗)+달(地)=빗달
빗달 > 비딸 > 비탈
'빌'이 개음절화하면 '빌'이 되는데, 이것이 '밸' · '별' 등으로 옮겨가면서 많은 관련 지명을 이루어 놓았다.
· 부수배리(부수밸):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 꽃비리(곶빌, 花硯): 경북 문경군 농암면 농암리
· 꽃벼루(곳별, 花峴):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리
위 지명들에서 '-배리' · '-비리' · '-벼루' 등은 모두 '밸' · '빌' · '별' 등의 연체형으로서 모두 '비탈'의 뜻을 갖는다.【주】27)
과천의 '배랭이'는 아래 위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골짜기 안쪽으로 있는 것이 '윗배랭이[上別陽]'이고, 골짜기의 바깥인 아래쪽에 있는 것이 '아랫배랭이[下別陽]'이다.
골짜기를 계속 오르면 청계산의 한 봉우리인 응봉(鷹峰) 마루가 된다.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관문리(官門里) 일부를 갈라서 과천의 옛 이름을 따서 부림동(富林洞)이라고 하였다.
'부림(富林)'이란 고려 성종대에 과주군의 별칭으로 붙인 이름인데, 조선의 정조 임금이 이 곳에 들렀을 때 과천현의 관아에 손수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을 써 주기도 했다.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문원리(文原里) 일부를 갈라서 만든 동으로, 행정동인 갈현동(葛峴洞)에 포함된다.
큰 바위가 청계산 북쪽 줄기의 기슭에 줄지어 있어 마을이름이 '줄바위' 또는 '죽바위'이던 것이 한자의 '주암(注岩)'으로 취해지게 됐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 '줄바위[注岩]'마을과 근처의 '돌무께[石浦]' · '삼부골[三浦]'을 합하여 주암리(注岩里)라 해서 시흥군 과천면에 편입시켰는데, 과천이 시로 승격하던 1986년에 주암동(注岩洞)으로 되었다.
과천시 대부분의 지역이 옛날에 과천군 군내면(郡內面)이었던 데 반해 이 곳 주암리(注岩里)만 유독 동면(東面) 지역이었다. 마을 앞으로 과천 여러 지역의 물이 모여 흐르는 양재천(良才川)이 지나고 있다.
1982년 6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1256호에 의해 문원리(文原里)의 일부를 갈라서 과천의 가운데에 있는 지역인 데다가 정부제2종합청사가 위치해 있어 중앙동(中央洞)이라 했는데, 관문동(官門洞)과 합해서 행정동을 이루고 있다.
현재 중앙동 동사무소내에는 정조가 화성군 태안읍에 있는 현융원(융릉: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쉬던 객사인 온온사(穩穩舍)가 있다.
【사진】가일마을
【지도】옛 갈현리의 자연마을
【사진】옥탑골
【지도】옛 문원리의 자연마을
【사진】세골[細谷]
【사진】사기막골
【지도】옛 관문리 일대의 자연마을
【지도】옛 막계리 일대의 자연마을
【사진】궁말
【사진】벌말
【지도】옛 주암리의 자연 마을
【사진】돌무께 마을
【사진】삼부골 마을 장승
【사진】한내 마을
【지도】옛 하리의 자연 마을
【사진】무네미 마을
【사진】하락골
【사진】뒷골 마을
【사진】안골 마을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군(安城郡)의 칠장산(七長山)에서 달기봉[鷄峰山]·광교산(光敎山) 등을 거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 한강(漢江)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해 불꽃처럼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冠岳山)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 관악구(冠岳區)와 안양시(安養市)·과천시(果川市)에 속해 있는 산으로, 높이 629.1m이다.
옛날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가평 화악산(華岳山)·파주 감악산(紺岳山)·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로, 빼어난 수 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울려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철을 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金剛山)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 하며 많은 암자들이 있다.
현재 서울 관악구로 들어간 북쪽 골짜기에는 서울 대학교(大學校)가 있고, 과천 쪽인 남서쪽 기슭에는 정부제2종합청사가 자리해 있다. 이 산과 그 남동쪽 청계산(淸溪山) 사이에 과천시(果川市)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서울 경복궁의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內案山은 서울 南山),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해서 이 산이 바라보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龍)을 넣어서 불의 기운을 누르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산꼭대기에 파 놓았다는 못의 흔적은 그 곳에 만들어 놓은 군사시설물로 인해 찾아 볼 수가 없다.
높이로 보아서는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강 유역 낮은 평지 위에 얹혀 있고, 또 주위에 큰 산들이 많지 않아 유달리 그 덩치가 커 보인다.
이 산은 옛부터 용마산(龍馬山: 서울과 구리시 사이)·삼각산(三角山)·덕양산(德陽山: 고양시 행주산성)과 함께 한양(漢陽: 서울)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로,【주】36) 서울로 보아서는 남쪽 바깥 울타리격의 산이었다.
이 산이 화산이란 점을 의식했던 조선 이태조(李太祖)도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無學)의 말을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의 남대문(南大門)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이나, 남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달게 한 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항시 막는다는 풍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압산(虎壓山)【주】37)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山上)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근처 호압사(虎壓寺)라는 작은 암자 뒤 비탈에는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한 모습의 범바위[虎岩]가 있는데, 이 호랑이(바위)가 날뛰지 못하게 억압하려 그 북쪽에 그를 위협하는 활에 해당하는 궁교(弓橋)와 사자에 해당하는 사자암(獅子庵)을 지어 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호랑이)가 날뛰면 금천현(衿川縣)의 지세가 쇠퇴하고, 금천현이 쇠퇴하면 결국 한양까지 재앙을 불러온다는 풍수설에 따라 조선 태조가 그런 장치를 했다고 한다.
관악산은 또 고려의 강감찬(姜邯贊)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주】38)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뿌리째 모두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면 그런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전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선 칡넝쿨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같은 타원형 자국들이 보인다.
관악산은 그 바위가 다른 산의 바위들에 비해 잘 미끄러지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고 옛부터 사람들이 믿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산 곳곳에 그렇게 험한 바윗길이 많은데도 눈 덮인 겨울에도 조난 사고나 추락사 같은 사고 등이 별로 없었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冠)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冠岳)'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산(山)'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운악(雲岳)·북악(北岳)·치악(雉岳)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관악산은 청계산(淸溪山)·삼성산(三聖山)과 함께 금지산맥(衿之山脈)을 이루는데, 이 산맥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험준한 산세에 깊은 골짜기들을 간직한 관악산은 기암괴석이 갖가지 모습으로 곳곳에 박혀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골짜기와 등성이에 15개가 넘는 절·암자가 있음은 이 산이 잘 알려진 명산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악산(冠岳山)이 남성적이라면 청계산(淸溪山)은 여성적이다.【주】39)
과천시의 시가지를 사이에 두고 정답게 양쪽에 자리한 이 두 산은 가운데 양재천 물줄기를 품에 안고 과천 땅의 큰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과천시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5㎞, 안양에서 북동쪽으로 12㎞ 떨어진 지점에 있는 청계산(淸溪山)은 그 큰 덩치를 남북으로 길게 깔면서 북쪽으로는 서울특별시, 서쪽으로 과천시와 의왕시(儀旺市), 동쪽으로는 성남시(城南市)에 접해 있다.
주봉인 망경대(望京臺: 618.2m)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은 이 산의 제2봉인 국사봉(國思峰, 또는 國恩峰, 538m)을 일으키고 의왕시 학현(鶴峴)을 넘어 마지막 여력을 모아 백운산(白雲山, 560m)·광교산(光敎山, 582m)을 일으켰다가 기세를 낮추어 수원시(水原市)에 이른다. 망경대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뻗은 작은 줄기는 절고개[寺峴]를 지나 응봉(鷹峰)을 일으켰다가 계속 그 줄기를 이어나가 남쪽에서 관악산의 지맥과 손을 잡아 갈고개[葛峴]를 이루어 양재천과 학의천(鶴儀川) 두 물줄기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옛부터 유명한 수원·안양·과천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한양길'을 서쪽에 두어 서울의 남쪽 숨통을 터 주었던 청계산은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원히 치닫는 경부고속도로를 산 동쪽에 끼고 있다.
관악산에서 남동쪽으로 빤히 보이는 이 산은 망경대와 국사봉이 형제처럼 다정히 서 있고, 망경대 북쪽으로 뻗은 줄기에는 또 하나의 봉우리인 옥녀봉(玉女峰: 373m)이 서서 그 여동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청계산에는 청계사(淸溪寺)라는 절이 둘 있다. 하나는 망경대 남서쪽 절고개 쪽에 있는 절이고, 다른 하나는 망경대 북동쪽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 있는 절이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전자의 것은 의왕시 청계동이고, 후자의 것은 서울 서초구 원지동이다.
의왕시 쪽의 청계사는 청계산 계곡 중 제일 골이 깊은 청계동 골짜기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다.【주】40) 통일신라 때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이 절은 조선시대 연산군이 도성안의 절을 폐사(閉寺)시킬 때 흥천사(興天寺)와 흥복사(興福寺)의 부처를 옮겨와 현재까지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절은 근세의 고승인 경허(鏡虛)스님의 입산지이다. 처음에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로서 비구니만 거처하였으나, 지금은 수원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서 참선도량이다.
최고봉 망경대(望京臺)는 이름 그대로 서울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서울'은 지금의 서울이 아닌 고려시대의 서울 송도(松都: 개성)를 가리킨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인 조윤(趙胤)이 이성계를 피하여 이 곳에 막(幕)을 치고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이라고 한다.
'청계산(淸溪山)'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고, 어떤 연유에서 이 이름이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우선 '청계(淸溪)'라는 이름이 붙고, 그러한 내를 지닌 산이어서 나온 이름이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이 산의 주봉인 망경대에서 흐르는 물줄기 하나가 서쪽으로 막계동 골짜기 사이를 따라 흐르는데, 이 내의 이름이 '맑은내' 또는 '맑내(막내)'이고, 이것의 한자식 표기가 '막계(莫溪)'·'청계(淸溪)'인 점으로 미루어 내이름에 따라 붙여진 산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청계산은 '청계산(淸溪山)' 외에 '淸鷄山'·'靑溪山' 등으로도 나오지만,【주】41) 기록한 이의 잘못이 아닌가 여겨진다.
청계산에는 그 줄기나 골짜기 등에 과천 서울대공원, 과천경마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을 두고 있다.
과천시 최북단에 있는 산. 높이 290m의 최고봉은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牛眠洞)과 방배동(方背洞) 사이에 있다.
산 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우면(牛眠)'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과천 쪽에서 이 산 밑의 여러 마을들을 일컬어 '우마니'라고 하는데, '우면이'란 말이 변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면'보다 대개 '우만'·'우마니'라고 토박이들이 많이 불러 온 것으로 보아 원래 '움안'에서 나온 땅이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주】42) 이 우면산과 관악산 사이에 난 고개가 남태령(南泰嶺)이다.
관악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크게 보아서는 관악산의 한 봉우리라고도 할 수 있다.【주】43)
최고봉은 높이 480m인데,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사이에 있다. 신림동의 서울대학교에서 남으로 4㎞, 안양에서 북서쪽으로 5㎞ 지점에 있다.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했다 하여 산이름이 삼성산(三聖山)이 되었다고 한다. 또 세 개의 막을 지었던 산이라 하여 삼막산(三幕山)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세 막(암자) 중에 일막(一幕)과 이막(二幕)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三幕寺)만 남았다고 한다.
관악산과 형제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산에는 반월암(半月庵)·염불암(念佛庵)·상불암(上佛庵)·만월암(滿月庵)·천인암(千人庵(·성주암(聖住庵)·약수암(藥水庵)·호압사(虎壓寺)·삼막사(三幕寺) 등의 많은 절과 암자가 있다.
과천시 막계동과 의왕시 청계동의 상청계(上淸溪)에 걸쳐 있는 산이다. 청계산의 한 줄기이고 높이는 365m이다.
'매봉'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의 '매'가 한자로 의역되어 '응봉(鷹峰)'이 되었다. '매'나 '응(鷹)'이 들어갔다고 해서 새이름의 '매(鷹)'와 관련지음은 잘못이다. 전국에는 '매봉'이나 '응봉' 또는 '응봉산'이 무척 많은데, 원래 '매봉'이 그 원 이름이며, 여기서의 '매'는 '뫼(山)'가 옮겨간 경우가 많다. 그 경우, '매봉'이나 '응봉'은 '산봉우리'의 뜻이 될 수 있다.
청계산 줄기의 응봉 북쪽 골짜기로는 사기막골·배랭이·십리골·샛말·맑은내(막계)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과천 서울대공원이 들어섬에 따라 많은 마을들이 없어졌다.【주】44)
이 응봉의 서쪽 줄기가 갈현동의 갈고개까지 이어졌다.
청계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일명 '망경봉(望京峰)'이라고도 한다. 서쪽에 있는 응봉(鷹峰)과 활 모양으로 휜 곡선 등성이로 연결되면서 그 아래에 과천 서울대공원이 있는 큰 골짜기를 이루어 놓았다.
봉우리의 서쪽은 과천 막계동(莫溪洞)이고, 동쪽은 성남시 상적동(上笛洞)이다.
북쪽으로 산줄기를 이으면서 옥녀봉(玉女峰)을 또 솟구어 놓았다. 봉우리에 서면 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히 내려다보인다.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이 이름이 붙었다.
남쪽의 망경대와 이어진 이 봉우리는 그 북쪽으로도 더 줄기를 뻗쳐 돌무께 뒷산(193. 4m)을 이루어 놓고 서울 양재동 만남의 광장 뒤에 이르러서야 그 기세를 죽인다.
이 봉우의 서쪽은 과천 주암동, 동쪽은 서울 원지동이다.
이 밖에도 갈치산(갈현동)·삿갓봉(문원동)·검단이산(주암동)·양갓산(주암동) 등이 있다.
과천의 관악산과 청계산에 그 물뿌리를 두고, 과천시 대부분의 물을 모아 시가지 중앙을 통과해서 과천동의 한내를 거쳐 선바위 앞에서 막계천(莫溪川)을 합하고, 계속 북동쪽으로 흘러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또 염곡천(廉谷川(을 합하고 강남구 개포동을 지나 대치동 은마아파트 뒤에서 탄천(炭川)과 합해 청담동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이다. 크게 말하면 한강의 한 지류이고, 달리 말하면 탄천의 지류라고도 할 수 있다.
양재천에서 가장 긴 지류는 홍촌천(洪村川)이다. 따라서 홍촌천의 시작점이 바로 양재천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홍촌천은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 남쪽의 한 봉우리인 칼바위 남동쪽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내는 좁은 골짜기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흘러 폭포골에서 두 폭포를 이루어 놓고 골짜기를 나와 정부제2종합청사 옆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과천 시가지 중심에서 여러 물줄기를 아울러 제법 큰 내인 양재천 본줄기를 이루어 놓는다.
관악산과 청계산 기슭 사이를 흐르는 이 내는 과천의 단 하나밖에 없는 물줄기로서 과천 시민들의 좋은 젖줄이 되어 주고 있다. 관악산 줄기와 청계산 줄기가 거의 평행선으로 북동향으로 늘어짐에 따라 그 두 산자락 사이에 낀 이 양재천 역시 그 방향 그대로 북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두 큰 산의 사이에 낀 과천은 들이 그리 넓지 못하다. 시가지 일대를 빼 놓고는 어디를 가나 모두 산이고 언덕이다. 산 사이로 난 긴 들판을 꿰뚫고 흐르는 이 양재천은 물의 양도 그리 많은 편은 못 된다.
'양재천'이란 이름은 이 내가 옛날의 양재역(良才驛) 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양재역은 서울에서 우면산 허리를 넘어 대모산(大母山)이 스러지는 목, 지금의 경부고속도로의 서초 인터체인지와 만남의 광장이 있는 양재 인터체인지와의 사이에 있었다. 이 양재역은 광주(廣州(·용인(龍仁)·안성(安城)에 걸치는 구내의 모든 역을 관할하는 도찰방(道察訪)이 있던 곳으로, 역으로는 꽤 큰 편이었다.【주】45) 이에 따라 이 일대에 '양재(良才)'·'역말[驛村]'·'역삼[驛三]'·'말죽거리' 등의 땅이름이 생겨났다.【주】46)
'양재'란 이름은 '낮은 재'의 뜻을 나타내는 '얀재'에서 나왔거나, '안쪽의 재'란 뜻의 '안재'가 변해 정착된 이름일 것이다.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한자 지명들이 토박이 땅이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아 이러한 한자식 풀이는 큰 의미가 없다.
양재천의 지류로는 홍촌천 외에 매봉골내·배랭이내·사기막골내·관문골내[官門川]·항골내·한내[寒溪]·맑은내[莫溪·莫溪川] 등이 있다.
【사진】양재천
문원리의 홍촌말[洪村] 앞을 지나는 내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현재 홍촌말이 없어져 마을이름은 부를 수 없게 되었으나 이 내가 그 마을의 이름을 지니고 있어 그 지명은 보존되고 있는 셈이다. 홍촌말은 남양 홍(洪)씨 집안네들이 많이 살아 그렇게 불린 것인데, 약 20여 호 정도 있었던 이 마을은 이 곳에 정부제2종합청사 등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홍촌천은 관악산 남쪽 골짜기인 폭포골에서 흘러내린다. 아래위로 폭포가 둘 있어 폭포골로 불리는 이 골짜기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관악산의 한 바위 봉우리인 칼바위까지 이르게 된다. 이 칼바위 바로 밑이 홍촌천의 물뿌리이다. 홍촌천이 양재천의 가장 긴 쪽의 지류이니 결국 이 곳이 양재천의 수원(水源)이 되는 셈이다.
홍촌천은 과천 시내에 이르러 다른 내들을 차례로 합한다.
【사진】홍촌천
청계산의 한 봉우리인 매봉[매봉산·鷹峰]의 서쪽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내이다. 이 골짜기를 '매봉골'이라 하는데, 매봉골을 흐르는 내이기 때문에 '매봉골내'라고 한다.
봉우리 서쪽 비탈을 타고 이 내는 갈현동의 매봉골 마을 앞에서 세곡(細谷)소류지라는 작은 못을 이루어 놓고, 계속 서쪽으로 흘러 세골[細谷] 마을을 지나 '피물들'이라는 넓은 들을 적시고는 관문천(官門川)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흐른다.
전국에는 이런 비고유명사같은 이름의 내가 무척 많다. '앞내'의 상대적인 이름으로, 마을 뒤에 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흔히 붙는다. 이 내도 문원리의 홍촌말 뒤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내는 홍촌말 뒤 관악산 형골에서부터 흘러내려 지금의 공업진흥청 서쪽 담을 돌아 홍촌천에 합수된다.
매봉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매봉골내를 이어받아 구리안앞들을 지나 북서쪽으로 계속 흘러 과천 시내 주공 아파트 3단지 쯤에서 홍촌천과 합한다. 합하는 지점 쯤에 옛날에 다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이 관문천은 47번 국도를 만나는 곳에서부터는 복개가 되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홍촌천과의 합수 지점도 볼 수가 없다.
관문천(官門川)이란 이름은 이 내의 상류 지역의 행정동명이 관문동(官門洞)이기 때문이다.
이 내와 홍촌천이 합해져 이루어진 양재천도 시가지 중심에선 일부 복개되어 볼 수가 없다. 냇물은 주공아파트 2·3·4·5·7단지의 북쪽 길을 따라 부림동 쪽으로 흐른다.
이 내는 관악산과 청계산 각 골짜기의 물들을 모두 합한다.
문원동의 사기막골을 지나는 내이다.
매봉의 북쪽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냇물은 골짜기를 따라 북서쪽으로 흘러 사기막골 앞을 지나 과천 시내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과천-의왕 고속도로를 만나는 지점에서부터는 복개가 되어 볼 수가 없다.
관악산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는 내로, 날이 가물어도 물이 마를 때가 별로 없다.
이 내는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서부터 흘러내린다.
처음에 '가는골'이란 좁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이 내는 남동쪽으로 항골 골짜기를 따라 구비구비 흘러내리다가 시흥향교 앞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바꾸어 흘러 부림교 옆에서 양재천으로 들어간다.
주공 아파트 11단지에서부터는 하천이 정비되어 직선으로 뻗어 있다.
과천 시내에서 이 내만 따라 오르면 관악산 최고봉 가까이 오를 수가 있어 등산하는 이들의 안내자 구실도 해 주고 있다. 골짜기 중간 쯤에서 물줄기가 둘로 갈라지는데, 그 오른쪽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된다.
【사진】항골내
별양동의 배랭이골(배랭이골)을 따라 흐르는 내이다. 웃배랭이 근처에서 시작되는 이 내는 북서쪽으로 흘러 아랫배랭이를 거쳐 과천시 중심에서 양재천에 합류된다.
다른 토박이 이름으로는 '맑내[막내]'라고도 하며, 한자말로는 막계(莫溪) 또는 막계천(莫溪川)이라고 한다. 이 내는 양재천의 여러 지류 중 과천 땅에 있는 것으로는 가장 크다.
수량도 풍부해 과천 서울대공원의 좋은 놀이터를 이루게 했고 많은 동식물들에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 내는 청계산 최고봉인 망경대 남서쪽에 그 물뿌리를 두고 있다.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흐르는 이 내는 과천 서울대공원을 지나 계속 북향하여 과천저수지를 이루어 놓고, 여기서 떨어진 물은 대공원 주차장의 동쪽을 지나 과천 하수종말처리장 북쪽에서 양재천과 합류한다.
과천 서울대공원에 필요한 각종 용수(用水)들이 이 막계천을 근거로 한다.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동식물들을 자라게 하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이 내는 과천저수지까지 이루어 좋은 인공 호수로 관람객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또 이 물은 저수지 아래쪽의 너른 들에 물을 대 주어 농작물도 키워 주고 있다.
'맑으내'란 이름은 이름 그대로 물이 무척 맑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 '맑으내'란 하천명은 그 냇가 마을의 이름까지 똑같이 만들어 놓고, 결국 지금의 법정 동명인 막계동(莫溪洞)이 나오게 했다. 막계(莫溪)는 마을이름으로 굳혀지면서 '맥개'로도 옮겨갔다.
'막계'에서 '막'은 '맑다'는 뜻의 '맑'의 취음이고, '계(溪)'는 '내'의 의역(意譯)이다.
【사진】막계천(맑으내)
이것은 지금의 과천동 일대의 양재천 이름이기도 하고, 그 냇가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한내'에서 '한'은 '큰'·'넓은'의 뜻을 가진 말이다.
관악산 동쪽 골짜기인 두테봉골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 과천동의 삼거리마을을 지나 선바위 근처에서 양재천으로 흘러드는 내이다.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동안 다른 골짜기의 물들도 합하고 있다.
【사진】삼거리내
이 내는 관악산의 동쪽 골짜기인 용마골에서 흘러내리는 내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내인데, 남태령 남쪽 비탈의 물도 모두 모아 물의 양을 불리면서 과천 서울대공원 입구에 이르러 삼거리내와 손잡고 그 남동쪽에 와서 양재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진】용마골 계곡
남태령과 우면산 정상을 잇는 능선의 남쪽 비탈을 타고 흐르는 이 내는 무네미 마을을 지나 계속 남동쪽으로 흘러 선바위 북쪽에서 하락골내와 합하여 그 유역의 부하지들을 적셔 놓고 조금 더 흘러 양재천에 합한다.
이 내는 과천 땅에 흐르는 여러 내 중에서 가장 북쪽에 물뿌리를 두고 있는 내이다. 우면산 남서쪽 서울 동작구와 서초구 그리고 과천의 경계 지점에 선 봉우리의 남서쪽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이 내는 남쪽으로 흘러 뒷골을 지나 골짜기 사이의 좁은 들을 적시면서 하락골에 이르고 거기서 무네미골내를 합해 길을 건너 양재천으로 들어간다.
청계산의 한 봉우리인 옥녀봉 남쪽 골짜기에서 시작, 서쪽으로 흘러 산골말을 지나 갱맹이 마을터 서쪽에서 과천저수지로 흘러드는 내이다.
옥녀봉 북서쪽 골짜기를 타고 북서쪽으로 흘러 삼부골[三浦]을 지나 승마경기장 옆을 지나 진투리들을 적셔 놓고 양재천으로 흘러드는 내이다.
옥녀봉 북쪽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진투리들 동쪽의 샛들을 적셔 놓고 역시 양재천으로 흘러든다.
내의 중간쯤에 돌무께[石甫] 마을이 있다.
갈현동의 자경골 쪽에서 흘러내리는 가일천 양옆으로 퍼져 있는 들이다.
들 안쪽으로 옥탑골·자경골 등의 마을이 있고, 내 아래쪽으로는 벌말·가일·찬우물 등의 마을이 있다. 주로 논벌로 이루어져 있다.
'쟁천'이란 이름은 자경골의 '자경천'이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자경천>자영천>장천>쟁천(들)
【사진】쟁천들(자경골 앞)
매봉 골짜기의 하나인 매봉골에서 흘러내리는 매봉골내 양쪽으로 퍼져 있는 논벌이다.
들 안쪽으로 매봉골·가루개 등의 마을이 있고, 들 북쪽에는 다락터 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구리안 마을 앞에 있는 들인데, 현재는 이 들의 일부에 주공 3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사진】구리안 앞들(일부)
세골[細谷] 골짜기에 있는 좁은 들로, 논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가 많이 오면 흙탕물이 많이 유입되어 물 빛깔이 마치 피와 같다 해서 '피물'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촌천·가일천·구리안내 등의 많은 냇줄기들이 합류, 양재천을 이루면서 그 유역으로 넓게 퍼진 들이다.
크게 보아서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의 넓은 들이며, 이 들 가장자리에 많은 좁은 들이 이어져 있다. 현재 이 곳에 과천 시가지가 들어섰다.
들이 무척 넓어 '큰들'이며, 다른 이름인 '한들'로 똑같은 뜻의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배랭이에 있는 들이다. 현재는 대부분 주택들이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림동에 있는 들로, 현재는 이 들 가운데로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가는 큰길이 지나고 있다.
과천저수지 아래쪽에 있는, 매우 넓은 들이다. 주로 논이며, 들 가장자리로 과천 서울대공원 행 큰길이 나 있고, 벌말·광창·
선바위 등의 마을이 있다. 막계동의 '벌말'이란 이름은 이 들 때문에 나온 것이다. 들 가운데로 과천저수지에서 흐르는 맑으내가 지난다.'상하벌'이란 이름은 들이 아래위로 크게 열려 있어 붙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과천저수지와 상하벌
막계동의 산골말 남쪽에 있는 좁은 들이다. 들의 일부가 과천저수지로 들어갔다. 뒷골내의 소(沼) 앞에 퍼져 있는 들이기 때문에 '소앞들'이다.
과천동의 하락골과 선바위 사이에 있는 들이다. 이 들의 동쪽에서 양재천과 맑으내가 합류한다.
과천 경마장 북쪽에 있는 들로, 들 가장자리인 우면산 기슭으로 양재천이 지난다. '새벌'이란 이름은 '새로운 벌'의 뜻이 아니라, '사이의 벌'의 뜻을 지닌 것이다. 땅이름인 '소새벌들'은 원래 '솔새벌들'이 변한 말로, '작은 새벌'의 뜻을 지닌다. '솔'은 원래 '작은'·'좁은'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광창마을의 북쪽에 있는 들로, 넓게 보아서는 '새벌들'의 일부이다. 마을 앞쪽에 퍼져 있는 논이기 때문에 '앞들'이다.
주암동의 담터골 골짜기 앞(북쪽)에 있는 좁은 들이다. 산등성이로 빙 둘러 있는 터(땅)이기 때문에 '담터들'이다. '담'은 산의 덩어리진 곳을 뜻한다.
이 들과 이어진 들이 그 북쪽의 남당블이다.
주암동의 담터골 골짜기 앞(북쪽)에 있는 좁은 들이다. 산등성이로 빙 둘러 있는 터(땅)이기 때문에 '담터들'이다. '담'은 산의 덩어리진 곳을 뜻한다.
이 들과 이어진 들이 그 북쪽의 남당블이다.
주암동의 돌무께 앞에 있는 좁은 들이다. 원래 '난담벌'이었던 것이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담벌'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벌을 뜻하며, '난'은 '나와 있는(불쑥 나온)'의 뜻이다. '난담벌'은 산쪽에서 앞으로 내민 들을 뜻한다.
난담벌>남담벌>남당벌>남당블
이런 식의 들이름은 전국에 무척 많은데, 대개 '사이의 들'을 뜻하고 있다. 주암동의 '샛들'도 역시 같은 뜻을 지녔다.
막계동의 과천저수지 위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주로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연인들의 산책 장소로 적합하다. 과천저수지에 물이 많아지면 이 잔디밭의 일부 또는 전부가 물에 잠겨 버린다. 이 들(마당)의 남서쪽에 과천저수지를 건너는 제4호교가 있다.
이 밖에도 번지들(갈현동)·긴논들(갈현동)·새마을 장승들(문원동)·행교들(갈현동)·혼논들(갈현동)·민경두들(갈현동)·길주리들(과천동) 등이 있다.
과천시의 과천동(옛날의 下里)과 서울 관악구의 남현동 승방뜰[僧房坪] 사이에 있는 큰 고개이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을 넘는 고개로, 고개의 남서쪽에 관악산 정상, 북동쪽에 우면산 정상이 있다.
옛날 한양(서울) 사람들이 충청도나 전라도로 갈 때 많이 넘던 고개로, 지형이 몹시 험해 이 고개를 넘으면 과천 읍내에서 쉬어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양에서의 남행(南行)길이 남태령과 과천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었음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 … 전라도로 나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주】51) 밖 내다라서 … 동자기【주】52) 밧비 건너 승방들,【주】53)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주】54)
『대동여지전도』 등의 다른 옛 지도를 보아도 서울에서 천안 삼거리 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과천을 통해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조선의 정조도 수원에 있는 부친의 능(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과천길을 주로 이용하면서 남태령을 넘었다. 정조는 한강을 주교로 건너 승방들을 지나 이 고개를 넘고 과천 읍내를 지나 사그내(지금의 의왕시 古川洞)로 해서 수원으로 가곤 했다. 수원으로 오가던 중에 자주 과천 읍내에 들러 쉬어 갔는데, 그 쉬던 장소인 온온사穩穩舍)가 지금도 중앙동 사무소 옆에 있다.
그러나 정조는 뒤에 길을 바꾸어 이 과천길을 피해 딴 길로 돌아간다. 즉, 노들나루(노량진)를 거쳐 시흥·안양을 지나 사그내로 갔다.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영의정 김상로의 동생인 김약로의 무덤이 갈현동 찬우물마을에 있어 그 앞을 지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남태령은 여우가 많아 '여수고개' 또는 '여우고개'로 불리던 고개였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정조에 의해 지금의 이름인 남태령으로 바뀐다.
정조의 행차가 이 곳에 쉬어 가던 어느 때, 임금은 수행하던 시종들에게 이 고개 이름을 물었다. 이 때 과천현 이방이던 변아무개가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자, 이미 이 고개 이름이 '여우고개'인 줄 알고 있었던 임금은 거짓말을 한 그를 나무라고 왜 남태령이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가 임금께 그 요망스런 동물 이름이 든 고개 이름을 감히 댈 수가 없어 갑자기 꾸며 서울 남쪽의 첫번째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이라고 아뢰었다고 하자, 이를 가상히 여겨 그 때부터 그가 꾸며 댄 이름대로 남태령으로 했다. 이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옛 문헌에 이 고개를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이라 했는데, 이것은 '여우고개' 또는 '여시고개'의 훈·음차이다. '여시'는 '여우'의 사투리이다.
이 고개는 옛날엔 여우와 뱀이 많아 혼자서는 감히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밤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옛날 과천현감 중엔 이 고개 밑에 유인막(留人幕)을 설치, 젊은이들을 파견해서 행인들을 고개 밑에 대기시켰다가 여러 명이 되면 호위를 해서 안전하게 고개를 넘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행인들은 호위해 준답시고 동행하는 그 젊은이들에게 노잣돈이 털리곤 해서 적지 않은 부담을 안아야 했다. 그들은 고개를 넘겨 줄 때 호위의 댓가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액수가 적으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행인들은 이 고개를 넘을 때 월치전(越峙錢), 즉 '고개넘잇돈'을 준비해 두고 넘어야 했다.
이 고개는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북한군의 격전지였다.
더구나, 관악산이 북한군의 산악진지여서 1951년에 국군이 재북상할 때 북한군이 필사적으로 이 고개를 방어하여 피차 많은 희생자를 냈다.
또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갔던 피난민들이 북으로 다시 올라오다가 과천에 많이 머물렀는데, 그들은 관악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말려 땔나무로 만들어 지게에 얹어 밤중에 이 후미진 고개를 넘어서 승방들을 지나 서울의 검은돌[黑石洞]]이나 사댕이[舍堂洞]까지 가서 팔기도 했다.
이 고개엔 약 20여 년 전에 큰 길이 나서 서울과 과천 사이의 숨통이 크게 틔었으나, 그 후 통행 차량의 계속적인 증가로 교통 상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고개 밑을 지나게 될 사당-금정 간의 과천선 전철이 완공되면 그러한 불편은 조금 사라질 것이다. '과천선'이 될 이 지하철 노선은 서울 사당역에서 군포 금정역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고개의 북쪽에는 '남태령역'이, 남쪽에는 '선바위역'【주】55)이 생기게 된다.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에서 안양시 관양동 부림말[富林洞]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칡나무가 많아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갈고개'의 '갈'은 땅이름에서 '갈라짐'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주】56)
이 고개 밑에 '가루개[葛峴]'와 '찬우물[冷井]'마을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고개는 아니고 낮은 능선이다. 향교말과 홍촌말 사이에 솟은, 관악산의 여맥인데 두 마을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 곳의 좁은 길을 많이 이용했다.
바위가 별로 없어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많이 썼고, 밤나무와 잡목이 무성했는데, 과천이 시가 되면서 무덤들과 나무들이 없어져 주택지로 개발됐다.
지금의 과천시청이 자리한 곳 부근이다. '능어리'란 이름은 '는허리'에서 나온 것이다. '허리(산허리)가 늘어짐'의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과천시 갈현동의 매봉골에서 매봉산 정상을 타고 그 남쪽의 의왕시 청계동의 중청계(中淸溪)로 넘는 고개로, 길은 등산길로나 사용될 정도로 매우 좁다. 매봉산 정상 근처는 고갯길이 몹시 가파르다.
문원동의 배랭이골을 타고 남동쪽으로 오르다가 매봉산 북쪽 능선을 넘어 그 동쪽의 막계동 과천 서울대공원 쪽으로 향하는 고개이다. 역시 좁고 험한 길로 되어 있어 이용하는 이가 많지 않다.
별양동의 새터말에서 베래이골 안쪽으로 가는 좁은 길의 고개이다.
산기슭을 활처럼 휘어돌게 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모퉁이를 도는 고개'라 해서 '모탯고개'이다.
지금 말의 '모퉁이'란 말은 '몬'에 '∼웅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몬+웅이=모둥이(모퉁이)
몬+앙이(앵이)=모댕이(모탱이)
이 곳의 '모탯고개'도 그 '몬'을 뿌리로 한다.
몬에(의)고개>모데고개(모테고개·모태고개)
과천동의 남태령에 있는 매우 작은 고개이다. 매우 작은 고개라는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과천동의 무네미골마을에서 그 북쪽의 우면산 남쪽 능선을 넘어 남현동을 넘어 남태령 마을로 가는 고개이다.
그 서쪽에 남태령이 있어 이용할 가치가 없는 데다 길까지 험해 고개다운 고개라 할 수가 없다.
주암동의 돌무께 마을에서 서울 강남구 원지동의 비랑골로 넘는 고개이다.
청계산 옥녀봉의 동쪽 능선을 넘는 고개로, 고개의 동쪽에 '큰비랑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
주암동 쪽의 골짜기는 '큰 산골짜기'라는 뜻의 '검단이골'이다.
주암동의 삼부골에서 막계동의 산골말로 넘는 고개이다. 주암 동쪽의 골짜기는 주암 소류지(小溜池)가 있는 '삼부골'이고, 막계 동쪽의 골짜기는 산골말이 있는 '산골'이다.
산골말 쪽의 골짜기에는 밤나무 단지가 있다. 청계산의 서쪽 지맥을 넘는 고개로 비탈이 가파르다.
문원동의 아랫배랭이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이주1단지 앞에 있는 작은 고개로, 이 곳에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양쪽에 작은 둔덕을 끼고 좁고 곧은 길이 과천 서울대공원 쪽으로 나 있다.
고개의 동쪽 아래로 테니스장이 있다.
주암동의 담터들에서 과천경마장 쪽의 진투리들 쪽으로 넘는 고개이다.
청계산의 북서쪽 지맥을 넘는 고개로 포장도로가 나 있다.
'구렁고개'에서의 '구렁'은 '굴[골]'을 뜻한다. '구렁'과 '고랑'은 '골(谷)'을 뿌리로 하는, 같은 어원의 말이다.
고개 양쪽의 비탈이 제법 심하다.
청계산 정상 근처의 고개로 매우 높다.
과천 서울대공원 뒤쪽 산길을 따라 좁은 등산길을 오르면 이 고개의 마루에 이르고, 거기서 남쪽으로 비탈을 타고 계속 내려가면 청계사(淸溪寺)에 닿는다.
이 고개의 동쪽 봉우리가 과천·성남·의왕시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절고개의 북쪽이 과천시, 남쪽이 의왕시이다. '절고개'란 이름은 청계사라는 절 때문에 나온 것이다.
절고개 서쪽에 있는 고개로, 역시 과천시와 의왕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절래미'란 말은 '절넘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절로 향할 때 넘는 고개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절넘이>절너미>절네미>절레미(절래미)
고개의 북쪽인 막계동 쪽은 비탈이 무척 심한 반면, 남쪽인 의왕시 청계동 쪽은 그리 심하지 않다.
청계산을 동서로 종주하는 등산인들은 망경대에 오르고 난 후, 그 남서쪽의 능선을 따라 이 고개를 지난다.
이 밖에도 갈현동에 뒷고개·사냥고개·으능재고개·찬우물고개·가일고개·응단말고개·넘말고개·옥탑골고개·박석고개·살푸재고개, 문원동에 아홉사리고개·능모테고개·뒷벌고개·길마재고개·큰고개·미굴고개·세골고개, 막계동에 맥계고개·괭매고개, 과천동에 안골고개·지령고개·마루고개·주암동에 담터고개·박석고개·골축고개·아랫고개·득실고개·등이 있다.
관악산 정상 남쪽 약 300m 지점에 솟아 있는 바위로, 일명 '란선바위'란라고도 불린다. 높이 약 5m 정도의 바위인데,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좀 멀리서 보면 비스듬히 휘어 있어 튼튼하고 묵직한 칼처럼 보인다.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이 바위 아래에서 무술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 아래(란남동쪽)란로 길게 이어져 패인 골짜기가 장군바윗골이고, 그 골짜기를 이룬 서쪽 능선이 팔봉능선이다. 팔봉(란八峰)란은 이름 그대로 8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어 나온 이름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봉우리로 되어 있어 관악산에서 가장 험한 능선인데,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기도의 영험이 있다고 알려진 이 바위 밑엔 무당들의 촛불이 꺼질 날이 없다.
【사진】칼 바위(란1)란
【사진】칼 바위(란2)란
관악산 정상 가까이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가 용마처럼 생겨 이 이름이 붙었는데, 일명 '말바위'라고도 한다. 바위 근처에 연주암(란戀主庵)란과 용마암(란龍馬庵)란 등의 암자가 있다. 아기낳기를 원하는 여자가 이 바위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소원을 이룬다고 해서 옛날부터 많은 여자들이 이 바위에 올랐다.
【사진】말바위
관악산 정상에 있는 큰 벼랑바위이다. 바위 위에 있는 암자인 연주대(란戀主臺)란는 신라 문무왕 17년(란677)란에 의상대사가 골짜기 아래쪽에 있던 관악사와 함께 창건한 암자인데, 원래 이름은 의상대(란義湘臺)란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그 충신 몇 사람이 이 곳에 올라와 숨어 살면서 그 서울이었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고 해서 '연주대(戀主臺)'라 부른다고 한다. 그 후 이성계가 관악사를 중창하였고, 효령대군이 관악사를 지금 연주암이 있는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 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강화에서 화의(和議)를 주선한 후금(後金: 뒤에 淸나라)의 사신 강홍립의 아내 소봉저가 갇혀 살면서 남편을 사모(戀主)하다가 남편의 자결 소식을 듣고 한많은 일생을 마친 곳이라고도 한다. 연주대는 수 십 길 칼날같은 벼랑 위에 축대를 쌓아 만든 암자로, 마치 구름 위에 뜬 누각을 연상케 한다. 연주대는 영험 있는 기도처로도 이름났다. 의상대사가 여기서 수도했고, 효령대군과 세조도 이 곳에서 조선 왕조의 사직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지금도 연주대에 있는 약사여래상이 영험이 많다고 하여 아낙네들이 줄을 이어 찾아든다. 연주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빌딩숲을 이룬 서울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북한산·도봉산의 줄기가 보인다. 남쪽을 보면 청계산과 과천시 일원이 한 눈에 들어오고, 날이 맑은 날에는 멀리 서해의 섬들까지도 보이는 때가 있다. 이 곳에서 능선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뻗어 나간다. 동쪽으로는 마당바위로 해서 남태령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이, 서쪽으로는 삼성산으로 향하는 조금 짧은 능선이, 남쪽으로는 칼바위를 거쳐 과천 갈현동 쪽으로 뻗으며 안양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이 있다.
연주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크고 넓적해서 '란마당'란이란 이름이 붙었다.
팔봉능선의 제7봉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신라시대의 금관 같기도 하고, 또 두 손을 얌전하게 합장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또 다른 방향에서 보면 마애불상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옛날엔 아들 못 낳은 여자들이 올라와 이 바위 아래서 간절히 소원을 빌기도 했다. 주위에 큰 바위가 없이 홀로 외따로 서 있어 더욱 돋보인다. 관악산의 여러 바위들 중 손꼽히는 명물 중의 하나이다. 바위가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랜 세월 속에 풍화작용으로 단단한 바위의 겉면이 매끄러울 정도로 닳아 있다. 관악산의 이름이 '란관(란冠)란'란자가 붙은 것은 이 금관바위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금관바위 근처에 있는 바위로, 몸이 뚱뚱한 사람은 빠져 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틈새가 나 있다. 이 바위를 지나 산길을 내려오면 무너미(란무네미)란고개가 앞에 나타나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삼성산이 나온다.
관악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바위로, 수 십 길 절벽을 이루고 있다. 바위 끝이 남성의 성기 같아 여인들이 이 바위 앞에 오면 얼굴을 돌리곤 한다.
관악산 옆 삼성산(란三聖山)란에서 서울 시흥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금지산(란衿芝山)란 호압사(란虎壓寺)란 뒤에 있는 바위이다.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한 호랑이 모습의 바위인데, 서울의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는 서울인 한양을 향해 날뛰는 호랑이 모습인데, 만일 호랑이가 날뛰게 되면 금천현(란衿川縣)란【주】57)란의 지세가 쇠퇴하고, 금천현이 쇠퇴하면 결국 서울까지 재앙이 닥친다는 풍수설이 있어, 조선 태조가 이 바위 북쪽에 이 바위(란호랑이)란를 위협하는 활에 해당하는 궁교(란弓橋)란와 사자에 해당하는 사자암(란獅子庵)란을 지어 이를 억압하였다고 한다.
관악산 정상, 연주암 아래에 있는 해골처럼 생긴 바위이다.
연주암 근처에 있는 바위로, 물개처럼 생겼다. 서울 쪽에서는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 뒷길을 타고 삼봉 약수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간 자리에서 이 바위를 볼 수 있다.
【사진】물개 바위: 상봉 약수터에서 만수천 약수터로 5분쯤 내려가면 왼쪽에 위치
물개바위의 아래쪽에 있는 연꽃처럼 생긴 바위이다.
물개바위의 위쪽에 있는 목탁처럼 생긴 둥근 바위이다. 다른 바위 위에 얹혀 있는데, 호두알처럼 둥글어 누구라도 슬쩍 밀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하다. '란목탁바위'란란 이름은 최근에 지어진 이름이다.
【사진】목탁 바위: 상봉 약수터에서 정상으로 올라가서 등산로를 따라 5분쯤 지나면 정면에 위치
관악산 정상에서 볼 때 그 북쪽 서울 쪽에 있는 바위이다. 신림동 서울대 정문 옆 관악산 관리사무소에서 제1광장을 거쳐 성주암 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다. 영락없는 개구리 형상의 바위인데, 누군가 머리쪽에 검은 칠로 눈까지 그려 놓았다.
관악산의 신림동의 골짜기 제2광장에서 삼막사 가는 길에 있는 바위로, 토끼의 모습과 같다. 바위의 색까지 흰색에 가까워 더욱 그렇다.
【사진】토끼 바위: 제 2광장에서 철쭉동산을 지나 5분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
토끼바위 옆에 물고기처럼 길게 생긴 바위이다.
남태령에 있던 바위로 길을 넓힐 때 없애 버렸다. 응달진 곳이어서 서울쪽에서 과천쪽으로 오던 이들이 덥거나 힘들면 이 바위 아래서 쉬어 넘었다.
장군바윗골에 있는 넓은 바위이다. 골짜기 안에 있는 두 폭포 사이에 있는 바위로,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씻겨 바위가 닳아 미끄러울 정도로 반질하다. 그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쉬는 맛이란 그야말로 일품이다. 폭포의 높이는 20m 쯤 되는데, 그 아래엔 수영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소(沼)가 있다. 바위는 수 백 명이 앉아 놀 수 있을 만큼 넓은데, 요즘은 이 반석 위쪽에 수도하는 사람들의 움막도 몇 채가 있다. 이 반석이 있는 넓은 목에서 두 골짜기가 갈라지는데, 왼쪽이 또 하나의 폭포를 거쳐 칼바위까지 가는 장군바윗골이다. 위폭포에서 10m 쯤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물은 20m 쯤 바위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다가 반석바위를 거쳐 아래폭포로 이어진다. 위폭포 옆에는 무당들의 움막이 있어 찾아오는 아낙네들이 줄을 잇고, 징과 꽹과리 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이 반석바위가 있는 장군바윗골의 물이 양재천의 최상류가 된다. 이 골짜기의 물은 문원동 쪽으로 흐르며 홍촌천을 만들고, 매봉골내·뒷내·항골내·배랭이내·관문천 등을 합해 양재천의 본류를 이룬다.
관악산 남쪽의 문원동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뒤주처럼 생겼다.
문원동에서 들어가는 관악산의 큰 골짜기 항골에 있는 바위로, 아기 발자국과 같은 자국이 옴폭옴폭 일렬로 패여 있다. 강감찬의 발자국이란 전설이 전해 온다. 이 밖에도 갈현동에 됨바위·치마바위·검바위, 중앙동에 거북바위·장군바위·족두리바위·말바위·문원동에 주걱바위·쇳돌바위·부처바위·멍석바위·항잣갓바위·막계동에 마당바위·과천동에 밤모테이바위·곧들머리바위·문바위·집바위·절터골·작박골·바든골·사태골·큰골·가세바위·남등바위, 주암동에 공알바위·가마바위·장수바위·얼경바위·소바위·줄바위·두껍바위·말바위·가랑바위·언친바위·쪽박바위 등이 있다.
【사진】돼지바위
【사진】고뇌바위
【사진】강아지 바위: 제 1광장에서 성주암쪽 산로를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
【사진】바둑이 바위: 제 2광장에서 새로 만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
【사진】도마뱀 바위: 바둑이 바위를 지나 15분쯤 가면 오른쪽에 위치
【사진】곰 바위: 도마뱀 바위를 지나 5분쯤 가면 왼쪽에 위치
【사진】명상의 얼굴: 깃대봉에서 삼막사 가는 등산로를 따라 5분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
【사진】낙타 얼굴: 삼막사에서 제 2광장으로 내려오는 오른쪽에 위치
【사진】잠자는 바둑이 바위: 상봉 약수터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면 왼쪽에 위치
【사진】달팽이 바위: 목탁 바위의 왼쪽에 위치
【사진】독수리 바위: 달팽이 바위 아래 계곡에 위치
【사진】코끼리 바위
관악산 연주암 북쪽 꼭대기 절벽에 있는 절이다.
신라 제 30대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가 좌선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조선 태조 원년(1932)에 중건하고, 고려의 남은 신하 강득룡(康得龍)·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여기서 송경(개성)을 바라보고 통탄했다 해서 '연주대(戀主臺)'란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4대 세종 11년(1429)에 효령대군이 절을 짓고 제25대 철종 때 나한 16위를 봉안하였다.
중앙동 향교말 서쪽 관악산 상봉 밑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의상대가 창건하고, 조선 태조 5년(1396)에 다시 짓고, 제4대 세종 11년(1429)에 효령대군이 중수하였으며, 제26대 고종 5년(1868)에 초가 10간을 짓고, 그 15년 후부터 행문스님이 여러 번 고쳤으며, 1918과 1928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대웅전안에 효령대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절 마당에 3층으로 된 석탑이 있고, 대웅전과 금륜보전(金輪寶殿) 등의 사우가 있다.
관문동에 있는 집으로, 조선 22대 정조가 수원 사도세자의 원묘에 거둥할 때 쉬어 간 곳으로 정조의 어필 현판이 있다. 집 앞에 수령 약 5백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문원동 향교말(현 중앙동)에 있는 옛 과천현의 향교로, 일제 시대에 시흥향교·안산향교와 합쳐 과천향교로 부르다가 1959년에 이름을 바꾸어 '시흥향교'가 되었다.
관문동에서 문원동으로 향하는 옛날 국도상이며, 이 곳에 옛날 과천현감의 선정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석들이 서 있어서 ཤ비선거리'이며 달리 '비석거리'라고도 했다.
이곳의 비석들은 과천에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도로의 정비로 모두 과천국민학교 옆으로 옮겨 졌다가 현재는 중앙동 사무소 경내에 옮겨 세워졌다.
막계동의 광명 남서쪽에 있는 큰 저수지로, 맑으내[莫溪川]를 막아 이루어진 것이다.
1956년에 막았는데 몽리 면적은 약 250정보이다.
막계동의 청계산 일원에 있는 큰 공원이다.
1978년 1월 16일 기공하고 1984년 5월 준공하여 서울의 창경궁 동식물원에 있는 동물과 식물을 모두 옮기고, 더 보충하여 세계에 유수한 공원이 되었다.
막계동의 산골말 동쪽, 청계산 기슭에 있는 폭포이다.
과천 읍내로 보아서 동쪽에 있어 '동폭포(東瀑布)'이며, 물이 수직으로 떨어져 수종폭포(水從瀑布)란 다른 이름도 가졌다.
정부제2종합청사 북쪽, 관악산 중턱에 있는 폭포이다.
폭포가 둘로 나뉘어 있어 그 위치에 따라 '위폭포'와 '아래폭포'로 따로 부르고도 있다. 앞의 '동폭포'의 상대적 지명이다.
갈현동의 찬우물 마을에 있는 우물이다.
뒷벌(별양동)·서낭당벌(주암동)·상아벌·광창벌(과천동)·오랑캐벌 등이 있다.
중앙동에 과천교·관문교·율목교·관악교·청사교, 문원동에 I.C교, 부림동에 부림교·부림2교·별양교, 과천동에 광창교 등이 있다.
【집필자】 배우리
과천지도
1871년 (고종9년)열읍지도등상령에 따라 이듬해 과천현에서 제작한 채색지도이다.지도에는 면.리 등과 산.하천.도로.창.사찰및 동서남북 방위.경계까지의 거리등이 표시되어 있다.
제1차 군사지형도
1895년 측량
1911년 인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보호국화 정책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한반도 전역을 측량한 군용비도로 1911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발행하였다.
과천군 지적도
1912년
28쪽을 하나로 이어붙임.
1895년(고종32)
'칙령 98호 지방제도 개정의 건'에 의해
과천현이 과천군으로 개칭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과천군을 시흥군에 통합하는 조치에 따라
과천군이 과천면이 되었다. 그러므로 과천군 명칭이 사용된 20년이란 기간 중에 제작된 귀한 지도이다.
과천의 거리와 지적은 현재의 과천 신도시 직전까지 유지되었었다. 위 지도는 남태령 주변 지적도이다.